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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 음과 같은 4종류의 원인에서 싹튼 것으로 보인다. (1) 시국을 모르는 완미(頑迷)한 부류(部類)들이 배일적(排日的)인 감정의 발분(發憤)을 참지 못하여 일종의 정치상의 의미를 갖고 일어난 것. (2) 군대 해산의 결과, 의식(衣食)에 궁한 해산병들이 자기의 입장을 비관하여 폭거(暴擧) 를 계획한 것. (3) 앞의 2항의 동기에 인유(因由)하여 지방의 무뢰도(無賴徒)는 일종의 호기심에 의하여 부화뇌동(附和雷同)한 결과, 폭도에 가담하기에 이른 것. (4) 지방의 초적(草賊) 등이 도량하여 약탈을 자행하기 위하여 의병(義兵)을 빙자하고 폭 도에게 기세를 올리게 한 것. 요컨대 본 관내의 폭도는 위와 같은 동기에 기인(基因)하여 혹은 배일적감상(排日的感想) 으로써 일어나고 혹은 자기의 처지를 비관하고, 혹은 호기심에서, 혹은 의병을 빙자하여 도량·약탈을 함부로 하기 위하여 봉기하였을 따름이다. 그 개황(槪況)을 종합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2. 다시 되풀이한 수괴자((首魁者)의 성명(姓名)·경력 및 폭거(暴擧) 중의 행동 정주원(鄭周源) 39세 경기도 죽산군(竹山郡) 원삼면(遠三面) 하수리(荷壽里) (1) 경력 불명 (2) 폭거 중의 행동 (ㄱ) 융희(隆熙) 원년(元年) 8월(일자 미상) 자진(自進)하여 의병에 투신하고, 당시 용인 군(龍仁郡) 굴암에 있는 30여 명의 지방 무뢰(無賴)의 도배를 끌고 양지(陽智)·양성(陽城) 군을 배회하여 도당(徒黨)의 모집에 힘써 150여 명의 당여(黨與)를 얻고 총기·탄약의 준비 또한 갖추어짐으로써 스스로 의병대장(義兵隊長)이 되어 부서를 정하고 거병(擧兵)하기에 이르렀다. (ㄴ) 8월 25일. 안성(安城)에 있어서의 의병 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부하를 거느리고 안성시(安城市)에 이르렀다. 이때 수괴(首魁) 7명, 부하 1만 명이 모였다 한다. 그리하여 목적한 회의는 각자 의견이 불일치한 결과 마침내 아무런 의결을 얻지 못하고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ㄷ) 회집(會集)의 다음날 29일 새벽. 일본군 40명의 습격을 받고 교전(交戰)하였으나, 잠시 후에 궤란패주(潰亂敗走)하였다. 9월 이후 죽산(竹山)·양지(陽智)의 양군을 배회, 어 리석은 인민을 선동하자 부하로서 투신하여 오는 자가 날로 더하여 한때 9백여 명에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