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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 5~6명의 의병이 마당에 들어와 내 앞에 정렬을 하더니 경례를 하였다. (중략) 나는 그 들이 갖고 있는 총을 보여 달라고 했다. 6명이 각각 다른 다섯 종류의 무기를 갖고 있 었 는데 어느 것이나 제대로 쓸 만한 총이 없었다. 한 사람은 가장 낡은 형태의 화승총을 갖 고 있었고, (중략) 두 번째 남자는 낡은 구 한국군의 총을 갖고 있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구식이어서 그 시대 최악의 견본이라고나 할 만한 물건이었다. 세 번째 남자 또한 마찬가 지였다. 또 한 사람은 총구로 탄약을 재는 아주 작은 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귀 여워하는 열 살 정도의 아이에게 주는 것 같은 결코 해를 가하지 못할 물건이었다. 또 한 남자는 기마용 권총을 갖고 소총 탄창을 붙이고 있었다. 세 자루의 총에는 중국 마크가 붙어 있었다. 그 모든 총은 어느 것이나 녹슬어 있고 부식된 것이었다. 설마 하니, 이 사 람들이 몇 주 동안이나 일본군에 항전할 것을 선언해 온 사람들이라니!! 무릇 의병은 확보할 수 있는 무기는 모두 사용하였다. 일본군에 비해 절대 열세였던 화 력의 확보가 전투의 승패를 가늠하는 요인이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의병들은 더 우수한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켄지도 의 병들로부터 근대식 무기를 제공해 달라는 간청을 받았을 정도였다. 이때 의병들은 원하는 돈을 모두 줄 수 있다고 하였다. 선생이 거느리던 의병의 무장상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하 는 위의 인용문에도 의병전쟁 전 시기에 걸쳐 가장 널리 사용되던 화승총을 비롯해 구 한 국군이 사용하던 양총, 모젤식 권총 등이 언급되고 있다. 매켄지는 의병이 소지한 낡고 조악한 총기류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심지어 의병 총기를 어린아이 장난감과 같다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고철덩어리와 같은 무 기를 가지고 최정예 일본군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의병들에 대해 그는 무한한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매켄지는 양평에서 만난 의병들을 정렬시켜 놓고 사진을 찍었다. 한말 의병전쟁을 상징 하는 의병의 모습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사진이 바로 이때 매켄지가 찍은 것 이다. 그 사진의 주인공들은 선생의 휘하에서 직접 활동하던 의병들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선생과 간접적으로 관계를 갖고 있던 의병일 것으로 자연 스럽게 추정된다. 7. 선생의 최후에 대하여 선생은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9중대와 수차에 걸쳐 접전을 벌이던 중 용문사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선생의 나이 31세로, 1907년 9월 2일의 일이 다. 선생의 후손들이 선생을 봉사(奉祀)하는 날짜를 미루어 순국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선생이 순국한 것은 아카시 중대와의 교전 무렵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