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page

422 으로 10리 떨어진 고비리(古非里)와 북방 30리 지점의 산지동(山地洞) 일대에서 의병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수차에 걸쳐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 참여한 의병은 200여 명 가량으 로, 일본군 정보기록에는 그 가운데 100여 명이 전사 순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을 만큼 큰 희생을 치렀다. 이때 살아남은 의병은 문호리를 거쳐 양주 등지로 흩어지면서 양평 일 대에서 의병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이로써 양평 의병 탄압전을 종료한 아카시 중대는 3일 고안(高安)으로 철수하였다가 다음날 서울로 돌아갔다. 6. 매켄지 기자, 양평 의병을 만나다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선생이 지휘하는 의병이 아카시 중대와 일대 격전을 벌인 직후에 영국 런던의 데일리 메일(daily mail) 지의 종군기자였던 매켄지(F.A. Mckenzie)가 양평 현지를 방문하여 전투에 참여한 의병을 만나고 당시 전황과 의진의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명저인 ‘한국의 비극(Tragdy of Korea)’에 나오는 의병 면 담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매켄지가 만난 의병 가운데는 선생이 지휘하던 의병도 포함되 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병을 찾아 서울을 나섰던 매켄지는 이천으로 내려간 뒤 다시 제천과 원주를 거쳐 양평 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의병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시기는 아카시 중대가 양평에서 의병 탄압작전을 벌이던 때이거나 막 종료한 직후로 추정된다. 그는 두세 차례에 걸쳐 의병을 만났는데, 그가 만난 의병들의 진술에 의하면, 한번은 40명의 일본군을 상대로 200명의 의병이 교전을 벌여 4명의 일본군을 사살하였고, 의병측은 2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또 다른 200명의 의병은 20여 명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 전투에 서 의병 5명이 부상을 입었고 그 가운데 3명은 일본군의 대검에 찔려 순국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의 내용과 정황으로 미루어, 여기서 언급한 전투는 선생을 비롯해 조인 환 등이 인솔한 양평 의병이 아카시 중대를 상대로 벌였던 교전일 것으로 합리적으로 추 정할 수 있다. 매켄지는 양평 의병의 용기와 애국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반대로 일본군의 만행에 대 해서는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하면서 그 내용을 세밀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는 출동한 일본 군으로부터 여러 가지 만행을 당한 양평 주민들을 처음 보았을 때 양평은 사람이 살지 않 는 듯이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문 뒤에 숨어서 매켄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 마 후 어른이나 아이들이 살그머니 나와서 접근해 왔다고 사실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이 를 통해 극도의 불안과 공포심에 쌓여 있던 당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매켄지는 양평 의병의 열악한 무장상태에 대해 매우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 대목을 인용 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