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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8월 23일, 일본군 장교 척후는 본 작전에 돌입하기에 앞서 양평읍 동북방에 있는 상원 사(上元寺), 용문사(龍門寺) 방면으로 의병의 동향을 탐지하기 위해 정찰을 나갔다. 선생 이 거느리는 100여 명의 의병은 이들이 접근해 오기를 기다리고 산중에 매복해 있던 중 적군이 나타나자 이들을 포위하고 맹렬한 사격을 가해 격퇴시켰다. 이때의 전투상황에 대 해 일제가 23일 양평에 파견되어 있던 정찰중대의 장교 척후는 양평 부근의 산중에 잠복 해 있던 100여 명의 폭도에게 포위되어 맹렬한 사격을 받아 잠시 응전한 후에 중대의 소 재지로 귀환했다고 실토한 사실만 보더라도 일본군이 얼마나 다급하여 혼비백산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튿날인 24일 일본군 제9중대의 제2소대는 전날 확인한 정보에 의거해 용문산으로 다 시 출동하였다. 일본군은 학동(鶴洞)에서부터 장수동(長壽洞), 연안막(蓮安幕)을 거쳐 상원 사, 용문사 방면으로 침입해 왔던 것이다. 선생이 거느리는 의병은 일본군의 이동 요로에 매복하여 있다가 곳곳에서 격전을 벌여 이들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의병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 일본군은 저녁 무렵 마동(麻洞)을 거쳐 조인환 부대가 대기해 있던 용문산 서쪽의 광탄(廣灘)으로 퇴각, 그곳에서 숙영을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이 부대는 지평 방면에서 신대(新垈), 흑천(黑川), 백현(百峴)을 거쳐 양평으로 귀환하던 중, 이들의 동향을 탐지하 고 백현 북방의 고지에 매복해 있던 의병들의 기습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의 병측도 수차에 걸친 이 날의 격전에서 50여 명에 이르는 커다란 인적 손실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23~4일간에 양평 각지에서는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위와 같이 대소 전투가 수차 벌어졌 다. 아카시 대위는 결국 그 동안 전투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양평 의병의 근거지 가 용문산 일대임을 확신하고 근거지를 초토화하기 위한 작전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9 중대 본대는 25일 용문산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 선생이 지휘하는 의병은 용문동 간 촌(間村) 부근에서 배수진을 치고 용문산 근거지를 방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전력 의 열세로 말미암아 결국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동한 일본군은 의병의 활동을 근원 적으로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유서 깊은 천년고찰인 용문사와 상원사를 완전 소각하는 만 행을 저질렀다. 이때 선생이 비축해 놓은 다량의 군량미도 함께 소각되고 말았다. 일본군의 만행으로 잿더미로 변해 버린 용문사와 상원사는 그 뒤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 르고 있다. 일제는 그 뒤 상원사의 명물이었던 범종을 일본으로 몰래 반입해 가는 문화재 약탈행위를 자행했다고 한다. 상원사 범종을 서울로 반입하는 과정에서 일본종과 한강에 서 은밀히 바꾸어 일본으로 가지고 갔다는 것이다.〔문제의 범종은 현재 상원사로 돌아와 진품여부의 논쟁에 빠져 있다(편자 주)〕 양평과 지평 각지를 유린하면서 의병 탄압에 혈안이 되어 있던 아카시 중대는 8월 28일 다시 광탄에 도달하여 마지막 탄압전에 돌입하였다. 29~30일 양일간에 걸쳐 광탄 서북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