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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 다. 선생의 의진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던 대표적 부대가 조인환(曺仁煥) 의병이었으며, 그밖에도 신창현(申昌鉉) 부대 등과도 상호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의진은 비록 독립된 부대였다고 하더라도 항일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언제나 연합작전을 구사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선생은 일제 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하는 와중에서도 전력을 확보하기 위한 군 자금 모금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단편적인 기록이지만, 이러한 정황을 짐작케 하는 것은 후술할 아카시 중대와 교전이 한창이던 1907년 8월 말에도 양평 수회리(水回里) 일 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8월 31일(음, 7월 23일)에 해산군인 김성완(金聖完)이 수회리에서 선생이 거느린 의병부대에 들어오면서 증언한 내 용이 그 사실을 말해 준다. 선생이 용문산 일대에서 항일전을 수행하던 시기인 1907년 8 월 말 인근의 오촌리의 부호였던 김윤구(金崙求)가 선생의 의진에 무기와 군량을 제공했 다는 이유로 일제가 그의 99칸 저택을 불태웠다는 기록도 그러한 정황을 짐작케 한다. 또 한 선생은 휘하 의병에게 매일 일정액의 급료를 지급하며 전투를 독려한 것으로도 확인된 다. 5. 용문산에서 격전을 벌이다 1907년 8월, 서울에 인접한 양평 일대에서 선생이 지휘하는 의병을 비롯하여 조인환, 신 창현 등 여러 의병이 활발하게 활동을 벌이게 되자, 이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 일제는 양 평 의병을 탄압하기 위한 이른바 작전을 구상하게 되었다. 소위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 와(長谷川好道)는 서울의 제13사단에 양평 의병 탄압 임무를 부여하였고, 13사단장은 보 병 제52연대의 9중대에 공병 1개 분대를 합류시켜 양평지역으로 급파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육군대위 아카시(明石) 중대장이 인솔하는 일본군 제9중대는 약 250여 명의 병 력으로 8월 21일 서울을 떠나 22일 양평 현지에 도착하여 곧바로 작전에 돌입하였다. 이 에 선생이 이끄는 의병을 비롯해 조인환 의병 등 양평 의병들은 출동한 일본군을 상대로 곳곳에서 크고 작은 격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군 대부대의 출동에 직면한 양평지역 의병은 대책을 협의한 끝에, 조인환 의병은 광 탄(廣灘) 방면으로 이동하여 전투에 대비토록 하고, 선생이 거느리는 의병은 용문산으로 들어가 근거지를 사수할 것을 결의하였다. 결국 선생은 용문산 자락의 상원사(上元寺)와 용문사를 최후의 전장으로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일본군과의 결전에 앞서 400명의 휘하 의병을 용문산에 집결시켜 놓고 비장한 각오를 다지면서 나라 없는 백성으로 왜놈의 노예가 되어 목숨을 부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당당한 삶을 누릴 것이라며 최후의 결전을 독려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