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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은 구국의 깃발을 들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선생이 창의한 시기는 광무황 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의병전쟁이 전국 각지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던 무렵인 1907년 7월 전후로 생각된다. 창의 후 선생은 양평의 용문산을 근거지로 삼고 양평을 비롯해 양주, 이천, 지평 등지를 전전하며 도처에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용문사(龍門寺)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놓고 활동하던 선생은 대세를 타고 휘하 의병을 이끌고 한강 이북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양평군 양서면 문호리(文湖里)의 한강 나루터에서 도강을 시도하였 지만, 선생의 도강을 차단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기병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이게 되었 다. 이 전투에서 선생이 이끈 의병은 일본군 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전력의 열세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고 용문산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호리전투 후 병력과 무기 등 전력의 부족을 절감한 선생은 홍천과 춘천, 화천 등지에 까지 활동지역를 넓혀 전력을 보강하였다. 선생은 다시 소장수를 가장하고 각지에 돌며 격문을 날리고 의병을 소모한 결과 170명의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이 거느린 의병은 한때 400여 명에 이르는 대부대로 성장하게 되었다. 4. 민긍호 등 여러 의진과 연합전선을 형성하다 강원도 일대에서 병력을 보강하여 세력이 크게 강화되던 무렵 선생은 전력을 극대화하고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기 위해 주변지역에서 활동하던 여러 의진과 연합전선을 구축하 는 데 노력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중부지방에서 맹위를 떨치던 민긍호(閔肯鎬) 의병과 연 합전열을 구축하려 했던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원주진위대 특무정교 출신의 해산군인 민 긍호는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이강년 의병장과 함께 연합전을 펴기 위해 충주, 제천 일대로 남하해 활동하였고, 이어 8~9월경에는 홍천과 횡성, 인제 일대로 북상해 도처에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때 선생은 민긍호를 직접 만나 항일전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 연합전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갑복(韓甲福), 박래봉(朴來 鳳), 최두환(崔斗煥), 주석민(朱錫敏), 장기환(張箕煥) 등의 의병장이 거느리는 부대와도 긴밀한 협조하에 항일전을 수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어떤 자료에 따르면 선생과 민긍호를 비롯해 이들 연합의진에 소속된 의병의 총수는 1만여 명에 달했다고 할 정도로 규모가 매우 컸다. 현재로서는 자료 부족으로 선생의 의병을 비롯한 이들 의진이 연합하여 전개 한 항일전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이러한 배경 하에서 1907년 말에 전국 의병의 연합체인 십삼도창의군이 결성되어 활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선생은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일제 군경을 상대로 의병이 각각의 단위 부대별로 활동하 게 되면 전력의 고립과 분산을 가져오게 된다는 점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므 로 양평 일대에서 활동하던 부대들과도 긴밀한 연계 하에 유기적인 항일전을 펴고자 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