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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 파견의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신 융희황제를 즉위케 하였다. 우리 민족의 절대적 구심체이며 반일투쟁의 정점인 광무황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강제 병탄을 시도하기가 어려웠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대한제국 병탄을 위한 마지막 정지작업을 감 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8월 1일부터 보름간에 걸쳐 서울의 시위대(侍衛隊)와 전국 각지에 주둔하고 있던 지방 진위대(鎭衛隊) 등 대한제국의 정규 군대를 강제로 해산함으 로써, 나라가 망할 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한국군대의 저항을 미연에 차단하고자 하였 던 것이다. 일제의 이러한 일련의 대한침략책동이, 특히 광무황제 강제퇴위와 군대 강제해산은 우리 민족의 대일 적개심과 항일기운을 더욱 고조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전 민족이 대일전에 동참하게 되는 구국의 성전(聖戰)인 의병전쟁으로 승화되었다. 나라의 운명이 이처럼 스러져가던 참담한 상황을 그 누구보다 더 개탄해 마지않던 선생 은 민족의 비극적 현실을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선생은 망국이 현실로 다가오던 을사 늑 결 후 가산을 정리하여 군자금을 마련한 뒤 거사를 위해 적지(適地)로 판단한 양평으로 내려갔다. 이후 선생은 순국할 때까지 양평을 주 근거지로 삼아 경기도의 양주와 포천, 그리고 강원도의 홍천, 화천, 춘천 일대를 전전하면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도처에서 영웅 적 투쟁을 벌이게 된다. 선생이 활동의 거점으로 삼은 양평은 시종일관 한말 의병전쟁의 중심에 놓여 있던 곳이 었다. 충청도와 강원도로 통하는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 지역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의 인후와도 같은 지리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더욱이 이곳은 많은 항일투사를 배출한 화서 이항로 학파의 중심무대로, 류인석(본 내용은 ‘유’;편자 주)이 이끈 제천의병의 연원 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1908년 1월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했던 십삼도창의군의 집결지가 양평(三山里)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이러한 지리적 연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 다. 3. 구국창의의 깃발을 올리다 양평으로 내려온 선생은 양근리의 기독교 신자인 홍여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거사를 위해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용문면 다문리에서 기독교 선교와 문명퇴치운동에 헌신하고 있던 김연재(金演在)를 만나 흉금을 터놓고 거의(擧義)를 협의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거병을 위해 가장 급선무인 의병 모집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김연재를 통해 교 회 신자들을 모집하고자 하였으나, 김연재는 선생에게 인적 자원이 한정된 교회보다는 각 처 시장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권고를 하였다. 이에 선생은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군자금을 토대로 소장수를 가장하고 양평, 양주, 이천, 지평 등지로 다니면 서 장날을 이용하여 격문을 돌리며 200명이 넘는 장정을 규합할 수 있었다. 이로써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