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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 ■ 상세내용 1. 감악산의 정기를 타고난 장사 나라 없는 백성으로서 왜놈의 노예가 되어 목숨을 부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으로써 나 라를 지킨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당당한 삶을 누릴 것이다. 권득수 의병장이 최후의 결전을 눈앞에 두고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부하들을 독려하는 가운데 유언처럼 한 말이다. 선생은 1873년(고종 10년) 경기도 양주군 남면에서 출생한 뒤, 파주군 적성에서 성장하 였다. 본관은 안동이며, 자를 성근(成根)이라 하였다. 선생의 부친인 권신영(權信榮)은 정3 품 절충위장(折衝衛將)을 지낸 무관 출신이었으며, 선생의 처가 또한 무관 집안으로 부인 이 정3품 오위장(五衛將) 서병만(徐丙萬)의 따님이었다. 선생의 유년기와 성장기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일찍부터 문무를 겸비하며 호연지기 를 키워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충효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 學)을 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학자 김정화(金正和)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충군애 국 사상을 배양해 갔다. 학문 수양뿐만 아니라 무인의 기상을 타고난 선생은 감악산을 무 대로 강건한 체력을 단련하며 뒷날 나라를 위해 헌신할 각오를 다져갔다. 2.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구국헌신을 결의하다 선생이 장성하던 무렵, 일제의 침탈로 인해 국운은 날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특히 1894 년 일제는 동학농민전쟁을 기화로 청일전쟁을 일으키면서 그동안 감추고 있던 대한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일본군대가 경복궁을 무단 점거하는 갑오변란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갑오경장을 강요하면서 내정을 간섭하는 침략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전국 각지에서 을미의병이 봉기하게 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였다. 그 뒤 일제는 1904년에 러일전쟁을 도발함으로써 대한침략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 에서 승리한 일제는 11월에 망국조약인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우리 민족의 격분을 샀다. 이에 을사조약 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고, 그러한 와중에서 전국 도처에서 재기한 의병이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최익현이 이끌었던 태인의병과 민 종식이 주도한 홍주의병이 일어난 것도 이 무렵이다. 1907년에 들어와 일제의 대한침략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해 6월의 헤이그특사의거를 기화로 삼은 일제는 한국 병탄을 목표로 한 일련의 침략정책을 강행하였다. 곧 헤이그특 사의 구국활동 소식을 접한 일제는 이를 계기로 한국병탄을 결정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로 하여금 일체의 침략정책을 선두에서 총괄 지휘하게 하였다. 7월 20일 정미7조약 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마지막으로 장악한 뒤, 7월 24일에는 급기야 특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