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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10). 2007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권득수 선생〔F자료10〕 훈격 : 애국장 / 서훈년도 : 1990년 ■ 공적개요 선생은 1877년 경기도 양주군 남면에서 출생하여 파주군 적성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안동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엄격한 충효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家學을 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학자 김정화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충군애국 사상을 배양해 갔다. 선생은 망국이 현실로 다가오던 을사조약 늑결 후 가산을 정리하여 군자금을 마련한 뒤 거사를 위해 적지로 판단한 양평으로 내려갔다. 이후 선생은 순국할 때까지 양평을 주근 거지로 삼아 경기도의 양주와 포천, 그리고 강원도의 홍천, 화천, 춘천 일대에서 투쟁을 벌이게 된다. 양평으로 내려온 선생은 거사를 위해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소장 수를 가장하고 양평, 양주, 이천, 지평 등지로 다니면서 장날을 이용하여 격문을 돌리며 200명이 넘는 장정을 규합하였다. 창의 후 선생은 양평의 용문산을 근거지로 삼고 양주, 이천, 지평 등지에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선생이 거느린 의병은 한때 400여 명에 이르는 대부대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강원도 일대에서 병력을 보강하여 세력이 크게 강화되던 무렵 선생은 민긍호 의 병을 비롯한 주변지역 의진과 연합전열을 구축하고자 시도하기도 하였다. 한편, 선생은 일제 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하는 와중에도 전력을 확보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1907년 8월, 서울에 인접한 양평 일대에서 선생이 지휘하는 의병을 비롯하여 조인환, 신 창현 등 여러 의병이 활발하게 활동을 벌이게 되자, 이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 일제는 양 평 의병을 탄압하기 위한 작전을 구상하게 되었고, 8월 23, 4일간에 양평 각지에서는 의 병과 일본군 사이에 수차례의 대소 전투가 벌어졌다. 선생은 일본군과의 결전에 앞서 400명의 휘하 의병을 용문산에 집결시켜 놓고 비장한 각오를 다지면서 “나라 없는 백성으로 왜놈의 노예가 되어 목숨을 부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당당한 삶을 누릴 것이다.”라고 하며 최후 의 결전을 독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은 일본군과 수차에 걸쳐 접전을 벌이던 중 용문사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선생의 나이 31세로, 1907년 9월 2일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