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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Ⅰ. 임진왜란과 양평의병 1. 왜적침입 길목의 양평 〔F자료壬1: 『양평군지』 상권, 양평군지편집위원회, 2005, 398~399쪽〕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때 양평지역은 왜군이 서울을 침입하는 길목으로 주목되었다. 『선조실록』26년 6월 5일 기사(F자료壬2 참조;편자 주)에 임진왜란 당시 전 국의 상황을 보고하는 글을 보면 양근과 지평은 모두 분탕을 겪었고 점거된 일도 있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경기읍지』(1871) 양근현 관액조 용진 조항에 전 하는데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 적병이 조령을 넘어 충주로 들어갈 때 두 길로 나뉘었는데 그 하나가 여주 에서 강을 건너 양근을 지나 용진을 거쳐 서울 동쪽을 침입한 것이다. 1595년(선조 28)에 경기좌영은 용진으로 이천, 양근, 지평, 양주, 포천, 가평 등 일곱 개 읍의 군사를 속하게 했다. 상류의 여울을 지키는 것은 여주로부터 하류인 양근의 군사와 용진에 이르기까지, 양근에서부터 용진에 이르기까지, 용진에서부터 광진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파사성을 보 전하기 위해 이천을 유진할 계책으로 양근의 군사와 용진에 있는 양근의 이중복 초군으로 하여금 부용산 위에서 파사성과 서로 호응하여 조금이라도 잃는 것이 없도록 하였다. 이 같은 것을 양근군수가 창의한 주민을 통솔하여 용진의 상류, 가평경계의 골짜기와 자세한 길 및 얕은 여울을 안 뒤에 기다리고 있도록 하였다. 그때 군수는 이여양이었고 용진을 지키게 하였다.” 우선 양근군의 용진이 왜군이 서울을 침입하는 주요 길목으로 이천 등 7개 읍의 군사가 모두 모인 군사적인 요충지였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양근의 군사와 용진에 모여 있는 이중복 초군이 파사성과 호응하여 용진을 굳건히 지키게 한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양근현 자체적으로도 주민들이 의병을 창의하게 되자 양근군수 이여양이 이를 통 솔하여 자세한 길과 여울까지 알게 하여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 25년 8월 1일 기사(아래 참조;편자 주)에 의하면 왜적은 결국 원주를 함락시키고 주둔하였는데 군영을 지평현까지 연결하여 서울에 이르는 길을 확보하 고 있었다. 한편 『선조실록』 26년 1월 11일 기사에 의하면 이일(李軼)이 군사 600명을 데리고 양근지역에 머물렀다는 기사가 있다.(본문내용 ‘李鎰, 1538~1601’은 오기임으로 편자가 바로잡았음;편자 주) 이처럼 양평지역이 충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군사상 중요한 길목이 되자 『선조실록』 26 년 9월 26일 기사에 의하면 충주와 더불어 양근과 지평의 수령에게 전담시켜 여울 건널 목에 군사를 배정하여 순찰하게 함으로써 비상사태에 대비하게 하고 일이 있으면 방어할 군사를 더 추가해서 방비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