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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 때때로 하나 둘 완미 고루한 무리로 우국(憂國)을 창도(唱導)하는 자 있었으나 이에 부화 뇌동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그런 무리들은 앞을 다투어 국경 외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내에 잔류하여 국외의 수괴와 다소 기맥을 통하는 자 없지 않았으나, 시종 관헌에게 그 행동을 감시 받 고 있었으므로 그저 산곡(山谷)에 숨어 있는데 지나지 않았다. 황해도의 폭도 수괴 김정 안·한정만·채응언 등이 그것이다. 기타 야소교회 보호 아래 숨어 은근히 배일사상을 품고 있는 자 적지 않아 전일의 총독 암살 사건 등의 수모자의 교사에 응하여 다수의 흉도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견 실한 사생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일시적인 선동에 따라 뇌동한 데 지나지 않았다. 국경 외에 있어서 선인(鮮人)의 이주 범위는 극히 넓어 접경인 노·청영토내(露淸領土內) 에 가장 많아 그 수 대략 30만이고 기타 만주(滿洲)·상해(上海)·하와이·미국(美國) 등에 배 일적 위험사상을 품고 있는 유력자들이 산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청 영토내로 이주한 선민(鮮民)의 대다수는 배일사상과는 추호도 관계없이 그 저 생활에 쫓기어 비교적 비옥한 대안지방(對岸地方)으로 이주한 자가 대다수였다. 그중 약간 유력한 선인(鮮人) 등은 외국보호통치권 안에 있음을 기화(奇貨)로 삼아 공공연히 결 사 단체를 조직, 언론 문필로 일반 무지한 인민을 선동하고, 의연금을 모집하여 총기 탄 약을 구입하며, 교사(校舍)·교회당을 건축하여 교육·권업(勸業)·무기의 연습을 하고 때로는 폭동 암살을 모의하고 혹은 격렬한 언론을 공개하여 여론의 동정을 환기하려고 노력 하고 있었다. 또 제3국의 원조를 얻으려 책동하여 국권의 회복, 한국의 재흥을 행동 목표로 정 하고 시세(時世)와 분투하고 있는 점은 반드시 만연한 공상이라고 그저 보아 넘길 수 없 는 점이 있었다. 이것의 발단은 41년 7월 상순 노령에 있는 수괴 이범윤(李範允)의 일파 약 2백이 고읍 (古邑) 부근에서 도문강(圖們江)을 건너 우리 신아산(新阿山)분견대를 습격하여 북관산(北 關山) 지방을 소요케 하였고, 42년 1월 하순에는 수괴 방덕형(方德亨)이 약 50명을 이끌 고 무상으로 침입하였다가 헌병대에게 구축당하고, 44년 3월 중순에는 홍범도(洪範圖)의 부장(部將) 박영신(朴永信)이 인솔하는 약 24~25명의 일단이 세천동(細川洞) 부근에서 수 비대에게 격퇴되었다. 기타 41년 3월 하순 미국에서 일어난 전 한국정부 고문이었던 미국 인 스티븐스씨의 암살 및 42년 10월 하순 하얼빈에서 이등(伊藤) 공작의 암살 등은 모두 국경외 망명자의 소위로서 그 일부에 있는 배일정신은 아직도 노고(宇固)하여 경시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 도배들은 상시 상호간의 질시반목(嫉視反目)이 계속되 어 일괄된 대규모적 행동을 감행 못하고 매년 도문강 결빙기(結氷期)에 대거 조선 내로 침입하겠다는 큰소리는 치지만 도저히 그 실행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언제나 그 런 망상을 가지고 시기를 노리며 음으로 양으로 우리 시정(施政)에 방해를 시도하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