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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2. 경기도 및 황해도에 있어서의 토벌 본년 초 임진강 하간지방(河干地方)에 있던 폭도는 작년 말부터 점차 증가되는 추세를 나타내어, 적은 것은 수십 명, 많은 것은 2백 명 내외의 집단이 되어 양주(楊州)·포천(抱 川)·영평(永平)·연천(漣川)·삭녕(朔寧)·금천(金川)·배천(白川)·연안(延安)을 연결하는 선내(線 內) 및 해상 도서에 걸쳐 배회 출몰하면서 매번 토벌대의 예봉을 피하였다. 그들은 또한 과약(寡弱)한 호위병·헌병 등에 대하여 공세적 동작을 취하고, 또 악랄한 수단으로써 재화 강탈, 양민 납치 등 폭행을 극하여 그 지방의 민심은 흉흉했었다. 경기·황해·강원 지방에 걸쳐 가장 성망이 높고 또 오래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수괴 이은찬(李殷賛)은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부흥사면(富興寺面)의 유생(儒生)으로서 천성이 영리하고 또 재기(才氣)가 있어 언제나 정의를 표방하여 교묘하게 민심을 수람하였다. 때마침 본년 1월 한황(韓皇)의 국내 순행(巡幸)이 있자, 이은찬(李殷賛)은 일본인 관리가 황제를 기만하여 일본으로 납치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목숨을 걸고 그 행차를 저지하겠다 고 호언하였다. 그는 민의(民意)를 받아들여 양식·군자금 같은 것도 직접 세민(細民)에게 요구하지 않고 각 면·동장 등에게 통고하여 일반에게서 징수하게 하고, 구입품에 대한 대 금 지불 등도 한 번도 그 기일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또 군표와 유사한 증표(證票)를 발 행하여, 그것으로 물자와 바꾸어 후일 반드시 통화와 교환하는 등 극력 민심수습에 부심 하였기 때문에 완미한 농민들은 그것을 환대하여 토벌대에게 그들의 행동을 밝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보초가 되어 폭도 소재지의 주위를 경계하고 혹은 밀정이 되어 관헌의 행동을 통고하는 등 음으로 다대한 편의를 주었다. 그러나 당시 이은찬(李殷賛)과 행동을 같이 하였던 윤인순(尹仁淳) 및 정용대(鄭容大)는 그 성행(性行)이 아주 달라 언제나 화적적(火賊的) 만행을 자행하였으므로, 본년 3월 이은 찬이 용산(龍山)에서 포박되자 민심은 곧 이배(離背)되어 폭도의 위세는 급속히 쇠하여졌 다. 1월 중순 온정원(溫井院) 부근의 폭도는 수비대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여 연안(延安)· 청단(靑丹)역 중간 지구에서 점차 남방 연안 도서로 도피하는 형적이 있었으므로 해주수 비대(海州守備隊)는 상등병 이하 헌병·순사·통역 등 18명으로 된 토벌대를 연평도(延坪島) 로 파견하였다. 이 토벌대는 1월 17일 연평도에 상륙하여 연안 선박을 한 곳으로 집결하 고 전망초(展望哨)를 배치하여 해상 교통을 경계하고 있었다. 19일 밤 폭도 약간은 2척의 배를 타고 증산도(甑山島) 방향에서 연평도 북부로 상륙하려 고 하였다. 토벌대는 곧 이를 공격하여 그 수괴 이근수(李根守) 이하 46명을 사살하였으 나 적선 1척은 증산도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북한산(北漢山)헌병파견소 및 고양헌병분견소 상등병 이하 6명은 적정 정찰을 위하여 2 월 27일 양주군(楊州郡) 석적면(石積面) 행동리(杏洞里)에 도달하였을 때 그곳에서 폭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