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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 제6편 명치 42,43,44년(1909~1911년;편자 주)에 있어서의 폭도 토벌 제1장 명치 42년 [서기 1909년]에 있어서의 토벌 1. 폭도개황 전년 6,7월 이래 적세는 크게 위축되었으나, 본년으로 들어와서도 아직 전혀 그것을 일 소해 버리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의연 산간 벽읍(僻邑)으로 출몰하여 우리 토벌대의 이목 을 피해 가며 약탈을 계속하였고, 또 입으로는 애국을 빙자하고 배일을 고취하여 시정(施 政)을 방해하는 자 있었으나, 역시 그 흔적을 전혀 끊어 버리지 못하였다. 특히 임진강 하간(河干) 지방, 즉 황해 동남부 및 경기 서북부 일대, 소백산 지방 즉 강 원도·충청북도 및 경상북도의 경계 부근, 그리고 섬진강 이서 지방, 즉 전라북도 서남부 및 전라남도 일원에 있어서는 그 출몰이 빈번하였고, 그 집단 역시 1백 내지 수백을 헤아 리는 자 있었으나, 그 밖의 다른 지방은 거의 진정으로 돌아가 폭도의 세력은 이상 3지방 에 국한된 듯한 느낌이 있었다. 전년 7월 이후 본년 6월에 이르는 1개년 동안은 매달 충 돌한 폭도의 총수 시종 3천 전후로서 적세는 거의 고정된 경황을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의 행동은 연월을 경과함에 따라 더욱 더 교묘함을 극하였다. 또한 그들의 첩보 근무 및 경 계법 등은 놀랄 만큼 진보되고 그 행동도 더욱더 민첩하여, 때로는 우리 토벌대를 우롱하 는 듯한 태도로 나올 때도 있어, 그 세력에 때로 소장(消長)이 있다 하여도 결코 경시할 수 없으니 과연 어느 때 완전 평정이 되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 우려하게 되었다. 따라서 42년 추계(秋季), 남한에 실시한 대토벌에는 40년 이래 효력이 미소하였던 대토 벌 방식을 고쳐 교반적(攪拌的)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즉, 토벌군을 세분하여 한정된 일 국지(一局地) 안에서 수색을 실행하여 전후좌우로 왕복을 계속하고, 또 기병적(奇兵的) 수 단을 써서 폭도로 하여금 우리의 행동을 엿볼 틈을 주지 않는 동시에, 해상에서도 수뢰 정·경비선 및 소수 부대로써 연안 도서 등으로 도피하는 폭도에 대비하는 등, 포위망을 농밀하게 하여 드디어는 그들이 진퇴양난에 걸려 자멸상태에 빠지도록 하였다. 이 토벌 방법은 의외로 효과를 거두어 폭위를 떨치던 거괴(巨魁) 심남일(沈南一)·안계홍 (安桂洪)·강무경(姜武京)·임창모(林昌模) 이하 20여 명을 포박 또는 사살하고 기타 8백 명 을 포획하였다. 그러자 자수 투항하는 자도 뒤를 이어 동년 10월 말에는 폭도의 최대 소 굴이었던 섬진강(蟾津江) 이서(以西)의 지구 전라남북도는 깨끗하게 청소되어 토민 역시 일제히 우리 은위(恩威)에 굴복하여 그 후 거의 평정상태로 회복되었다. 이렇게 하여 동 년 12월에는 전국에 있어서의 충돌 폭도의 총수는 현저하게 줄어 실로 3백 명에 미달하 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