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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 수괴 차도선(車道善) 등이 계속 귀순하고, 전라북도의 수괴 기삼연(奇三衍), 강원도의 수 괴 민긍호(閔肯鎬) 등은 생포 또는 사살되어 적세는 크게 꺾이어 일시 평정도 시간문제로 되었었다. 그런데 3월 하순 전 한국정부 고문 겸 통감부 촉탁이었던 미국인(美國人) 스티 븐스씨가 미국에서 배일주의(排日主義)의 한인의 손에 살해되고, 그 소식이 한국 내에 전 하여지자 이것이 동기가 되어 형세 일변, 적세는 다시 격증하여 폭도 봉기 이후 미증유의 기세로써 그 소요 구역이 확대되어, 5월에는 이미 수비대 및 헌병 경찰과 충돌한 폭도의 총수는 약 1만 1천4백에 달하고, 1백 명 내지 8백 명의 적군(賊群)은 함경남도 갑산(甲 山)·고원(高原), 평안북도 강계(江界), 평안남도 영원(寧遠), 황해도 곡산(谷山), 강원도 이 천(伊川)·평강(平康)·화천(化川)·양양(襄陽)·울진(蔚珍)·평해(平海), 경기도 양주(楊州)·포천 (抱川)·파주(坡州), 충청북도 괴산(槐山), 경상북도 봉화(奉化), 전라북도 무주(茂朱)·태인 (泰仁)·정읍(井邑), 전라남도 나주(羅州)·동복(同福) 등 각 지방에서 횡행하여, 6월에 조사 한 바에 의하면 전국을 통하여 수괴 2백41, 폭도 3만 1천2백45명에 이르러, 곧 우리 수 비대로 격파하여 버렸다고는 하지만 그 때문에 각 지방은 일시 적세가 재연될 기운에 있 었다. 이때를 당하여 앞서 본국에서 증파된 1천1백여 명의 헌병은 이미 도착하고, 보병 제23 및 27, 2연대 역시 점차 상륙을 끝내 각 요소에 배치되고, 또 각 토벌 기관의 통일 을 얻어 서로 협력하여 적도의 소굴에 대하여 엄준한 토벌을 가하였으므로, 비도(匪徒)의 집단은 곧 궤멸하여 적괴(賊魁) 이하 전사하는 자 부지기수여서 6,7월 이래 적도는 한층 그 기세를 잃고 허위(許蔿)·이강년(李康䄵) 이하 약 30명의 수괴는 육속 포박되고 귀순하 는 자 역시 적지 않았다. 이에 있어 40년에 폭도가 봉기한 이후 점차 그 소요 구역을 확 대하여 일시는 전국을 뒤덮던 적염(賊焰)도 점차 소멸되어 강원도·경상북도·충청북도 같 은, 일시 적세가 창궐을 극하였던 지방도 점차 진정되고, 평안남도 및 북도에는 그 일부 에 초적(草賊)이 출몰하는 데 그치고, 함경남북도는 일부에 저명한 수괴(首魁)가 있어 끊 임없이 대언 호어, 무지한 민중을 선동하였으나 그 부하는 극히 미약하여 겨우 우리 경비 가 박약한 신아산(新阿山)을 일차 습격하였음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전라북도에 있어서는 적세는 의연 감퇴함이 없이 추수기에 즈음하여 재연될 경향을 보이고, 그 기맥이 인접한 충청남도에까지 미쳤으므로, 우리 수비대는 그에 대하여 일층 경계를 엄중히 하여 그 피 해를 극소에 그치게 하였다. 따라서 41년 말에 있어서는 경기·황해·전라·경상도 지방을 제 외 하고는 대체로 진정되어, 그 잔존 폭도의 실질은 대개 재물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한 국 고래의 초적과 그 내용을 같이 하여 깊이 심산계곡으로 은거하여 겨우 그 여명을 보존 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본 연도에 있어서의 토벌 행동은 병력 증가 기타 관계로 인하여 전년과 같이 비교적 큰 집단을 장시일에 걸쳐 소탕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고 수비대를 분산 배치, 구역제를 취하 여 봉기하면 토벌해 버릴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으므로 토벌의 효과도 양호하여 비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