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page

378 산전소대(山田小隊)는 8일 오후 거창(居昌) 서북방 약 60리 지점인 월성(月城)에서 폭도 약 3백과 만나 그 수 10을 사상시키고 서방(西方)으로 궤주케 하였다. 전주(全州)수비대에서 전선 수리 호위를 위하여 안의(安義) 방면으로 파견하였던 1분대는 7일 안의 부근에서 폭도 약 3백과 충돌하여 그 6명을 사살하고 서북방으로 격퇴시켰다. 거창(居昌)·안의(安義) 부근의 폭도는 지리산으로 들어가 칠불사(七佛寺)를 근거로 4일 하 동경무서(河東警務署)를 습격한 것을 비롯하여 시시로 남하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진주 파견대장 소관대위(小山大尉)는 하동(河東) 방면을 정찰한 결과 폭도 약 3백이 칠불사(七 佛寺)·연곡사(鷰谷寺)·문수동(文殊洞)에 있음을 알고 16일 간 화개장(花開場)에 이르러 광주 (光州) 수비대장 목야대위(木野大尉)가 인솔하는 1소대와 연락하고 17일 새벽 연곡사를 포 위 공격하여 수괴(首魁) 고광순(高光詢) 이하 22명을 사살하고 수10을 부상시키고 연곡사 는 소각하였다. 폭도는 거의 지리멸렬 여러 곳으로 궤주하였다. 그 후 경상남도의 폭도의 주력은 전라도로 이동, 거의 정온을 되찾았다. 4. 전라북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10월 2일 폭도 약 70이 전라북도 임실(任實) 부근에 출몰하여 동지 주재 일본 교사 1명 을 참살하고, 또 3일에는 금산(錦山)부근에 약 1백 명의 폭도가 출몰하여 우편국·세무서 및 일본인의 가옥을 불태우고 수명을 참살하였다. 이 보고에 접한 영동수비대(永同守備隊) 는 4일 정상소위(井上少尉) 이하 20명을 금산(錦山)으로 파견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이동 후였으므로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였다. 5일 폭도 약 1백이 진산(珍山)을 습격, 약탈을 자행한다는 보고에 접한 전주수비대(全州 守備隊)는 6일 1소대를 파견하여 이를 궤란시켰다. 전라 양도 접경에 있는 순창(淳昌)·구례(求禮)에서 이북 임실(任實)·진안(鎭安)·용담(龍潭) 및 전라북도·충청남도의 접경에 있는 금산(錦山)·진산(珍山)·연산(連山) 부근에 폭도의 출몰 이 빈번하였다. 그래서 남부수비대 관구 사령관은 그 토벌을 계획하고 목포(木浦)·성주(星 州)·영동(永同)·대전(大田)·공주(公州)·군산(群山)·광주(光州)의 각 수비대에서 장교가 지휘하 는 반소대 내지 1소대의 병력으로써 각각 중산(中山)·용담(龍潭)·금산(錦山)·진산(珍山)·인천 (仁川)·판교(板橋)·고산(高山)으로 보내 포위적 토벌 행동을 실시하였다. 각 토벌대는 13일 행동을 개시하여 각기 목적지로 향하여 소탕에 종사하였으나 더 이상 적정(敵情)에 대하여 얻는 바 없이 17일 목적지에 도착, 빈손으로 다시 원 수비지로 돌아 오고 말았다. 이는 폭도들이 각 토벌대가 도착하기 전에 정확한 정보를 얻어 주력을 경상 도 거창 방면으로 이동시키고 나머지는 양민을 가장하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