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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 하는 이인재(李寅在), 양근(楊根) 부근에 있는 신창현(申昌鉉) 등의 수괴는 약간의 부하를 지휘하여 도처에서 약탈을 자행하고 철원 부근에서는 김화(金化)·금성(金城)의 수비대의 압 박을 당하고 있던 왕회종(王會鐘) 및 김수묵(金壽默)의 무리가 경원가도(京元街道)의 동부 로 잠입하여 춘천(春川)·낭천(狼川)·양구(楊口) 부근에 출몰하였다. 강기사단장(岡崎師團長) 은 그 지방 부근의 소탕을 위하여 재 경성 보병 제 55연대 제 5중대에 기병·공병 약간을 붙여 토벌시켰다. 이 토벌대는 2일 경성(京城)을 떠나 고안(高安)·양근(楊根)·용두(龍頭)를 경유 전진하여, 5 일 춘천 수비대에서 나온 등원소대(藤原小隊)와 연락하고, 홍천(洪川) 서방 약 10리 지점 인 오류정(梧柳亭) 부근에서 약 60의 적을 공격하여 그 6을 죽이고 궤주시켰다. 7일 등원소대(藤原小隊)는 춘천(春川)으로 귀환하였다. 토벌대는 홍천(洪川)을 떠나 일몰 시(日沒時) 유목동(楡木洞)에 도달하자 폭도 약 70이 동지 동서남쪽 고지 산정(山頂)을 점 령하고 아군의 전진을 방해하는 것과 충돌하였으나, 일몰(日沒)로 인하여 공격을 중지하고 현재 대형대로 철야하였다가 8일 새벽에 그를 인제(麟蹄)·춘천 2방면으로 궤주시켰다. 9일 소림토벌대(小林討伐隊)는 인제로 전진하여 금성수비대(金城守備隊)에서 파견된 삼포 소대(三浦小隊)와 연락하고 동일 서호리(西湖里)·광치령(廣峙嶺)을 경유 양구(楊口)에 도착, 그 부근을 수색하였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10일 소림토벌대(小林討伐隊)는 김화수비대(金化守備隊)에서 파견한 삼우소대(森友小隊) 와 연락하고 삼포소대(三浦小隊)와 함께 3개의 다른 도로를 잡아 낭천(狼川)으로 향하였다. 오후 3시경 삼포소대는 낭천(狼川) 동방 약 10리 지점에서 먼저 폭도 약 50과 만나 공격 하는 한편 소림토벌대와 삼우 소대도 약간의 폭도와 만났는데, 그 수 2백 헤아려 맹렬히 추격했으나, 거리가 멀어 겨우 그 8명을 사살했을 뿐 나머지를 동방으로 놓쳐 버렸다. 이 폭도의 수괴는 지용기(池龍起)였다. 소림토벌대(小林討伐隊)는 12일 낭천을 출발 죽둔리(竹屯里)를 경유, 13일 청평천(淸平川) 에 도착 동지 부근을 소탕하고 16일 경성으로 귀환하였다. 삼포(三浦) 삼우소대(森友小隊)도 13일 각기 수비대로 귀환하였다. 충주(忠州)·음성(陰城) 가도상 신대(新垈) 부근에 폭도 약 5백이 집합, 장차 대소원(大召 院)을 습격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얻은 충주 수비대장은 15일 장교 이하 23명을 정찰을 위 하여 신대(新垈) 부근으로 파견하였다. 정찰대는 오추 4시 망청보(望淸甫)에 도착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방호동(芳湖洞) 방면으로 도주하였음을 알고 야행군으로 그것을 추적하여 16일 오후 5시 폭도 약 2백50을 추급하 고 그 중 12를 사살하고 신전(薪田) 방면으로 격퇴하였다. 17일 오후 충주(忠州)를 떠나 한강을 따라 용산(龍山)으로 향하여 하행중이던 육군 환자 운송선은 천포(泉浦) 하류 약 10리 지점인 법천(法泉) 서쪽에 이르자, 동지 남방 고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