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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 밝았을 때 폭도 약 2백은 다시 남방에서 아군에게 배사(背射)를 가하게 되고 또 나팔을 불 며 돌격을 감행하여 왔다. 정찰대는 병력과 휴대 탄약의 관계상 폭도를 격퇴할 가망이 없을 뿐 아니라 전멸 직전 상태에 놓이게 되므로 결연 폭도의 박약부(薄弱部)를 돌파, 현창리(縣倉里) 서남 고지로 후 퇴, 점차 퇴각하여 폭도와 접촉을 끊고, 오후 10시 진부(珍富) 서북방 약 80리 지점인 생 둔(生屯)에 도착하였다. 다음 그 곳 면장을 시켜 진부분견대에 증원대와 탄약의 청구를 하 고, 4일 오후 하사 이하 7명과 탄약의 보급을 얻어 다시 현창리로 향하는 도중 각등(角謄) 에서 정보를 듣고 급거 출동하여 온 강릉수비중대와 합세하여 현창리(縣倉里)에 도착하였 으나, 폭도는 이미 인제(麟蹄) 방면으로 도주한 후였으므로 중대는 1소대를 양양(襄陽) 부 근에 잔류시키고 강릉으로 귀환하였다. 9월 하순 쌍호(雙湖) 장양리(長楊里) 부근에 폭도의 도량이 심하므로, 남부 수비관구 사령 관 의전소장(依田少將)은 백암장(白岩場)·장호원(長湖院)·음성(陰城)·청안(淸安)·오근장(梧根 場)·병천(並川)·직산(稷山)·양성(陽城)의 각 수비대를 통일 계획하에 쌍호(雙湖)를 목표로 하 여 포위적 토벌을 맡은 각 종대(縱隊)의 병력은 보병 2소대 내지 반 소대로 하고 그에 공 병 및 특설 순검 약간을 따르게 하였다. 각 종대는 6일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8일 오후 오근장종대(梧根場縱隊) 및 양성종대(陽城 縱隊)는 화산동(花山洞) 부근에서 약50~60의 적을 협격하고, 또 같은 날 장호원종대(長湖 院縱隊)와 백암장종대(白岩場縱隊)도 만죽(晩竹)부근에서 약 40~50의 적을 협격하였다. 음 성종대(陰城縱隊)는 동일 장양리(長楊里) 서방 2000m 지점에서 폭도 40을 엄습하여 그 14를 죽이고 각 종대는 같은 날 오후 4시 쌍호를 포위하였으나 적을 보지 못하고 피차 정 보만을 교환하였다. 이것을 종합하면 폭도의 대부분은 우리 계획을 찰지하고 그달 1일부터 5일에 이르는 사이에 청주(淸州)·청안(淸安) 지구를 통과하여 미원(米院) 방향으로 도주한 듯 예기의 효과를 얻지 못하고 9일 각기 수비지로 귀환하였다. 함창(咸昌)수비대에서 파견한 정찰대는 10일 의상동(義尙洞)에서 폭도 약 3백과 충돌하여 격전 3시간 후 그 30을 죽이고 그것을 송면장(松面場) 방면으로 격퇴하였다. 9일 적도(賊徒) 약 50이 화령장(化寧場) 부근에 출몰 약탈을 자행하고 송면장(松面場) 부 근에도 적이 나타났다는 경보가 빈번하였다. 이에 있어, 상주 수비대장 산전소좌(山田少佐) 는 그 소탕을 획책하고 장교 이하 12내지 20명으로 된 5종대를 편성하여 11일 송면장으 로 향하여 포위적 행동을 실시하였다. 각 종대와 충돌한 폭도는 합계 약 8백이고, 그에게 준 손해 또 1백에 달하였으나, 대부분 은 사분오열(四分五裂)하여 도주하였기 때문에 섬멸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들 폭 도의 수괴는 이언용(李彦用)·이완채(李完蔡)·이구채(李求蔡) 등이었다. 춘천(春川) 부근에서 창의대장(倡義大將)이라 칭하는 지용기(池龍起) 및 총수(總帥)라 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