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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 陽)·장성(長城) 등 각군의 관아를 습격 약탈 참살을 감행하였다. 다음 40년 2월에는 남원 (南原)에서 적괴(賊魁) 박재호(朴在浩)가 부하 약 70명을 이끌고 남원진위대를 습격, 일시 이를 점령하였으나 동 진위대의 공격으로 곧 패주하였다. 다시 그해 4월에는 최익현(崔益 鉉)의 부하였던 경상남도의 유생 이광선(李光先)이란 자가 폭도 약 1백여 명을 이끌고 능 주(綾州)를 습격하였으나 그곳 주재 순사에게 격퇴당하였다. 6월에는 기우만(奇宇萬)이 장 성(長城)에서 포박되고 그 여당의 대개는 해산하여 일시 민심이 안정되고 폭도들의 기세 는 꺾이었으나, 7월 경성(京城)에서 한병(韓兵)의 폭동이 일어나고 이어 각 진위대가 해산 되자 전라 양도에서 폭도의 기세가 재연되어 완미(頑迷)한 유생(儒生)이 그늘에서 민심을 동요시키고 무산(無産) 부랑(浮浪)의 무리가 이에 부화뇌동하여 40년 겨울부터 41년 및 42년에 걸쳐 폭동은 가장 창궐하였다. 9월 상순 광주(光州) 부근에서 곡성(谷城)·담양(潭陽)·창평(昌平)·옥과(玉果)에 걸쳐 민정 (民情)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10일에 이르자 드디어 일군의 폭도는 순창 우편국을 습격 약탈하고, 15일에는 약 2백의 폭도가 동복(同福)순사 주재소를 습격, 19일에는 구례(求禮) 및 영광(靈兆)의 분견소가 습격당하였는데, 이 폭도의 수괴(首魁)는 김동식(金東値)·고광순 (高光珣) 등으로 전라남북도에 있어서 폭도의 선구자였다. 9월 하순 약 3백의 폭도가 계룡산(鷄龍山) 백암동(白岩洞) 부근에서 봉기하였다. 이를 토 벌하기 위하여 25일 연산(連山)분견소에서 파견된 일부대는 약 6시간 교전을 하였으나 이 를 격퇴하지 못하고, 다시 공주(公州)수비대에서 1소대를 증파하고 26일 이를 야습하여 진산(珍山) 방면으로 격퇴하였으나 그들은 27일 재차 진산(珍山)을 습격, 그 주력을 용담 (龍潭) 서방 20리 지점에 집합하여 부락민을 규합 그 세력은 더욱더 강대하여졌다. 9월 상순 녹도(鹿島 ; 남포 서방 약 16해리)에 폭도가 봉기하였다는 정보를 듣고 군산 (群山)수비대에서 파견한 척후 3명은 순사 1, 일본인 수명과 함께 폭도 약 2백에게 포위 되어 참살당하였다. 이에 군산 수비대장은 하사 이하 18명을 인솔하고 경찰관 일행과 함 께 13일 군산을 떠나 14일 녹도(鹿島)에 도착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도주한 후였으므로 폭도의 부락 및 어선을 소각하고 피해자의 유해를 거두어 귀환하였다. 녹도에 있어서의 폭도의 대부분은 그 후 안면도(安眠島)·보령(保寧)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이상 기술한 외 에 9월 중에 있었던 소충돌을 표시하면 다음 표와 같다. [각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 일 충돌 지점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수원(水原)수비대의1소대9월 4일충청북도 진천(鎭川)약150사30 청주(淸州)수비대의 하사 이하 11명 15일충청북도 미원(米院)약300사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