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page

370 중대에서 신제(新溪)에 파견하였던 중촌소대(中村小隊)에게 명하여 시변리(市邊里)를 경유 토산(兎山)으로 나아가 상전부대(上田部隊)와 책응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 상전대위(上田大尉)가 인솔하는 1소대 및 중촌소대(中村小隊)는 도중 아무런 소득 없이 25일 토산(兎山)에 도착하였다. 중촌 소대는 19일 시변리(市邊里)에서 폭도 약 60을 공격 하여 그를 토산 방면으로 궤주시키고 20일 중대와 합류 21일 밤 중대는 안협(安峽)을 야 습하였으나 이미 폭도의 대부분은 철원 방면으로 도주한 후였으므로 아무 소득 없이 25 일 각기 수비지로 귀환 하였다. 재 경성 보병 제50연대 제7중대는 금성(金城) 수비를 위하여 21일 경성을 떠나 양주(楊 州)·적성(積城)을 거쳐 부근의 폭도를 소탕하면서 23일 토산(兎山)에서 숙영하였다. 그때 안협(安峽)에 있던 폭도 약 2백은 그 후 철원을 습격 우리 우편 사무원을 참살하였다는 보고에 접하고 24일 철원을 향하여 전진 중 석교(石橋) 서방에서 폭도 약 1백 명과 조우, 그 중 14명을 사살하고 또 석교 촌민이 전부 폭도의 편임을 알고 그 촌락을 소각하여 버 렸다. 오후에는 마갈지(馬乫地) 부근의 폭도를 소탕하면서 25일 오전 철원에 도착하였으나 폭 도는 이미 도주한 후였다. 김화(金化) 수비 보병 제51연대 제6중대는 수비 교대를 위하여 새로 파견된 보병 제50 연대 제6중대의 1소대와 협력하여 철원 부근 폭도 토벌을 목적으로 25일 김화(金化)를 떠 났다. 일몰 후 철원에 도착 백정중대(白井中隊)와 합류하여 그날 밤 폭도 약 8백이 철원 남방 약 3리 지점인 심원사(深源寺)에 집합하고 있는 것을 정찰하고, 백정중대(白井中隊) 와 협력하여 26일 야반부터 행동을 개시 각 방면에서 심원사를 포위하는 등 전진하였다. 서천중대(西川中隊)는 27일 오전 3시 법화동(法化洞)에서 약 1백50의 폭도와 충돌하여 그 중 20을 사살하고 궤주시키고, 오전 5시에 심원사(深源寺)에 도착하였으나 폭도는 약 1시간 전 이미 도주하고 없었다. 백정중대(白井中隊)와 아부소대(阿部小隊)는 다 같이 폭 도와 조우하지 않고 전후하여 심원사에 도착, 다시 철원을 향하여 귀환하는 도중 오후 3 시 대광리(大光里) 동북방에서 약 2백50의 폭도와 충돌하여 그 중 80은 사살하고 잔여는 산곡(山谷)으로 궤주시켰다. 28일 각대는 그 수비지로 귀환했다. 4. 전라남북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민종식(閔宗植) 및 최익현(崔益鉉)의 무리는 전년 충청남도 홍주(洪州), 전라북도 남원(南 原) 등지에서 봉기하여 민종식과 최익현을 포박 처형하였으나 그 도당이었던 유생 백낙구 (白樂九)·기우만(奇宇萬)·고광순(高光詢) 등은 무지한 주민을 유혹 선동하고 비직관리(非職 官吏)를 자주하여 비도 50여 명을 규합, 39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구례(求禮)·광양(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