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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曺仁煥)이 인솔하는 폭도는 9월 상순 경기도 양주(楊州) 및 파주(坡州) 부근으로 이동하 여 약탈 횡포를 극하여 경원(京元)·경의(京義)가도 부근에 적세가 만만치 않았다. 그로 인 하여 제13사단장은 보병 제51연대 중대장 전변대위(田邊大尉)에게 제1중대 및 제10중대 의 반 소대, 임시 산포 1소대, 공병 1분대를 주어 양주(楊州) 부근을 또 보병 제52연대 제12중대에게는 파주 부근을 토벌시켰다. 전변토벌대(田邊討伐隊)는 7일 경성(京城)을 떠나 수종대(數縱隊)로 나뉘어 8일 오전 4시 30분경 양주(楊州)에 있는 폭도를 포위 공격하여 그 16을 사살하였으나 대부분은 암야(暗 夜) 아군의 포위를 찰지하고 양주 동방 및 북방 산지로 도주하였다. 겸전중대(謙田中隊)는 8일 경성 출발 파주 경유 전진을 계속하였으나 도중 폭도와 조우 하지 못하고 석우리(石隅里)에 도착하여 전변토벌대(田邊討伐隊))와 연락하였다. 8일 전변토벌대(田邊討伐隊)는 양주(楊州) 토벌 후 폭도를 수색하면서 가라비리(加羅非 里)로 향하여 전진중 동지 서북방 석적리(石積里) 쪽에서 보통 한인(韓人)으로 분장한 남 녀가 삼삼오오(三三五五) 계속 아군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았으나, 그들의 대 부분이 통과한 다음에야 비로소 변장한 폭도임을 간파하고 곧 총포탄의 사격을 가하였다. 그때 마침 겸전중대(謙田中隊)는 석우리(石隅里) 북방 고지에 나타나 포위 태세를 취하였 으나 겨우 그 중 10여 명을 사살하였을 뿐 폭도는 방향을 바꾸어 북방으로 도주하였다. 9일 전변토벌대(田邊討伐隊)는 가라비리(加羅非里)를 출발 선업리(仙業里)애 도착하였을 때 양주(楊州) 및 파주(坡州)의 폭도는 적성(積城) 부근에 집합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고 야행군으로 전진 10일 새벽 적성을 포위하고 포격을 개시하였으나 성내는 적막하기만 하 고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의 말에 의하면 적괴(賊魁) 권준(權俊, 적성 출신) 이 인솔하는 폭도 약 3백은 어제 밤 동방을 향해 도주하였다고 한다. 겸전중대(謙田中隊) 는 9일 신산리(莘山里)를 향하여 전진하였으나 적의 상황을 얻지 못하고 11일 경성(京城) 으로 귀환하였다. 전변토벌대(田邊討伐隊)는 도주하는 폭도의 주력이 영평(永平) 서남 약 20리에 있는 산내리(山內里)에 집합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 12일 적성을 떠나 일부는 영평을 경유 경원 가도를 남하시키고, 주력은 산내리(山內里)를 향하여 전진하였으나, 폭 도는 이미 경원 가도의 동방으로 도주하여 버린 후였으므로 15일 경성(京城)으로 귀환하 였다. 적성(積城)에 있었던 폭도의 수괴(首魁) 왕희종(王會鐘)과 김진묵(金溱默)은 11일부터 13 일에 걸쳐 적성(積城)·삭녕(朔寧)·안협(安峽)·토산(兎山) 등 각 지방을 약탈하고 장정을 모 집 그 수는 4백에 이르렀다. 그리고 임진강 유역 일대의 땅 및 경원 가도 김화(金化) 부 근은 특히 배일사상이 강렬하여 주민의 대부분은 폭도에 가담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재 평양 보병 제52연대 제4중대장 상전대위(上田大尉)는 부하 1소대를 인솔하고 평양에서 기차편으로 금천(金川)에 하차하여 구화장(九化場)을 경유 토산(兎山)으로 향하고, 또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