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page

368 부근에서 숙영하고 폭도가 대성사(大成寺 ; 문경 동북 산중) 및 금룡사(金龍寺 ; 문경 동 방 약 40리) 부근에 집합한 것을 알고 불파소좌(不破少佐)에게 보병 1중대, 기관총 2를 주어 그것을 소탕시키게 하였다. 불파소좌(不破少佐)의 일대는 대성사와 금룡사 부근의 폭도 약간을 소탕하였으나 그 대부분은 이미 영천(榮川)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대봉(臺封)에 있던 송야중대(松野中隊)는 삼해리(三害里)를 경유 대성사(大成寺) 부근을 정찰 중 적성(赤城) 부근에 폭도가 집합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고 14일 적성시장의 동서남 3방면에서 촌락을 포위하고 돌격을 하자, 폭도는 당황하여 시장 동북방 고지로 퇴각, 약 간 저항을 하였으나 우리의 맹렬한 사격에 의하여 사상 15를 유기하고 드디어 영천(榮川) 방면으로 궤주하였다. 이 폭도는 이강년(李康䄵)이 인솔하는 것으로 반란병이 다수 섞여 있었다. 제1종대는 15일 영양(英陽)을 떠나 영양 동북 20리 지점에서 적괴(賊魁) 신돌석(申乭石) 이 인솔하는 폭도 약 150을 엄습하였다. 폭도는 시체 12를 유기하고 영덕(盈德) 가도 방 면으로 궤주하였다. 또 동일 동 종대의 석환소대(石丸小隊)는 영양(英陽) 북방에서 폭도 50~60을 추격 그를 공격하여 북방으로 궤주시켰다. 제2종대는 주력을 영주(榮州)에 두고 일부를 풍기(豊基)로 내보내 죽령(竹嶺)·단양(丹陽) 및 적성(赤城) 사이를 정찰 소탕에 종사하였으나 드디어 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20일 군사령관은 토벌대의 일부로 경상북도 해안에 있는 폭도를 소탕시켰고 그 나머지 부대는 각기 수비지로 귀환시켰다. 국지대좌(菊池大佐)는 그 제 3대대장 강택소좌(江澤少佐)가 인솔하는 제11중대 (1소대 결) 및 제12중대에게 명하여 24일 영천(榮川)을 떠나 영춘(永春)·영월(寧越) 방면을 소탕 시켰다. 제10중대에게는 25일 춘화(春化)를 떠나 울진(蔚珍)·영해(寧海)·영덕(盈德) 부근을 소탕시켜 점차 영일(迎日)·울산(蔚山)으로 남하시켰으나 적정(賊情)을 얻지 못하고 10월 5 일 대대본부는 부산(釜山)에, 제11, 12중대는 밀양(密陽) 및 삼랑진(三浪津)에 이르러 그 후 각기 그 지방 수비에 임하고, 제10중대는 울산에 머물고 있었다. 25일 저녁 영주(榮州)를 수비하고 있던 서강중대(西岡中隊)는 죽령(竹嶺)을 넘어 영춘(永 春)으로 진출하여 그 곳에서 약 3백 명의 폭도와 충돌 교전 약 1시간 후 그것을 궤주시 켰다. 이 폭도는 이강년(李康䄵)이 지휘하는 집단으로 원 안동진위대의 해산병을 가담시 키고 있는 폭도는 우리의 맹렬한 추격에 의하여 지리멸렬 사상 약 50을 유기하고 산간으 로 도주하였다. 3. 경기도(京畿道)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8월 하순 양근(楊根) 부근에서 명적중대(明石中隊)에 의하여 소탕된 수괴(首魁) 조인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