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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 18일 음성(陰城)에 도착 무극장(無極場) 부근에 폭도 집합이라는 정보를 얻어 19일 무극장 (無極場)을 향하여 전진 중 사정리(沙亭里)에서 약 200의 폭도와 조우, 그 중 16을 사살하 고 그들을 무극장 방면으로 궤주시키고 20일 충주로 귀환하였다. 19일 장호원(長湖院)수비대는 동지 동남방면에서 약 4백의 폭도의 습격을 받아 교전 2시 간 후 그것을 격퇴하였다. 폭도는 시체 10을 유기하고 동남방으로 궤주하였다. 원주(原州) 의 하림지대(下林支隊)에서 정찰을 위하여 파견된 평도소대(平島小隊)는 22일 원주(原州) 서방 문막(文幕) 부근에서 폭도 약 1백을 야습하여 그중 10을 사살하고 궤주시켰다. 원주(原州) 부근의 폭도는 원래 횡성군(橫城郡) 갑천면(甲川面) 갑천리(甲川里) 부근 및 그 동방 약 2리에 있는 봉복사(鳳腹寺)를 근거지로 하여 부근 부락에서 물자를 약탈하고 동영 준비(冬營準備)를 하면서 있다는 정보에 접한 하림지대장(下林支隊長)은 좌등대위(佐藤大尉) 에게 보병 2소대와 기관총 2를 주어 토벌시켰다. 이 부대는 22일 횡성(橫城)에 도착, 23일 오후 1시 갑천리(甲川里) 및 봉복사(鳳腹寺)에 있는 폭도 약 3백50을 습격, 그 중 50을 사 살하고 동방산지(東方山地)로 궤멸시키고, 봉복사를 불태워 버리고 24일 원주로 귀환하였 다. 양식 호위로서 경성(京城)에서 한강의 흐름을 따라 충주(忠州)로 향한 보병 제51연대의 탕 천중위(湯淺中尉)가 인솔하는 1소대는 24일 새벽 양근(楊根) 서북방 약 10리 지점인 사탄 (沙灘)에서 숙영 중 그 동북 고지 및 서방에서 약 2백의 폭도의 습격을 받아 교전 2시간 후 격퇴하였다. 폭도는 시체 20을 유기하고 각 방면으로 궤주하였다. 탕천소대(湯淺小隊)는 25일 오후 2시경 양근(楊根) 상류 약 10리 반 거리인 구포(龜浦) 부 근에서 약 2백의 폭도와 조우, 그것을 구포 서방 고지로 구축하고 있었다. 그때 원주 하림 대(下林隊)와 수비 교대차 경성(京城)에서 파견된 보병 제51연대 중대 전변대위(田邊大尉)는 그날 양근(楊根)을 출발 자포(紫浦)로 향해 행군 중이었는데 구포 방면에서 나는 총성을 듣 고 그 부근을 정찰시켰던 바 신천(新川) 동남 고지 일대를 점령하고 있는 폭도 약 3백이 점 차 구포 방면으로 전진하는 움직임이 있음을 알고 1소대를 구포 방면으로 우회시켜 탕천 소대와 연락, 3면에서 합세 공격을 하여 적 27을 죽이고 동방으로 궤주케 하였다. 29일 전변중대(田邊中隊)와 탕천소대(湯淺小隊)는 여주(驪州)에서 숙영 중 적괴 김봉기(金 鳳基)가 인솔하는 폭도 약 4백의 습격을 받아 전변중대와 탕천소대는 교전 약 2시간 후 적 28을 사살하고 여주 서남 북성산(北城山)방면으로 궤주시켰다. 30일 하림지대(下林支隊) 및 족달지대(足達支隊)는 그 편성이 풀려 하림지대(下林支隊)는 10월 3일 원주 출발 여주·이천 경유 수원(水原)에 이르러 그곳을 수비하고, 족달지대(足達 支隊)는 영죽(永竹)에서 약간의 폭도를 소탕하고 10월 3일 경성(京城)으로 귀환하였 다. 2. 경상북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강원도에 있는 폭도는 9월 그 주력을 경상북도 북부로 이동한 듯 3일 이강년(李康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