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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4일 영주(榮州)에 있는 서강중대(西岡中隊)는 안동 부근 봉서루(鳳棲樓)에서 약간의 폭도와 충돌 그것을 격퇴하고 그 근거지를 소각하였다. 간성(杆城) 부근 폭도 토벌을 위하여 원산(元山) 보병 제50연대에서 보병 1소대를 해로로 장전점(長箭店)에 상륙시켰다. 이 소대는 고성(高城) 부근에 있는 폭도를 소탕하고, 5일 간 성(干城)으로 들어가 창암점(窓岩店) 및 그 부근의 폭도를 소탕하고, 13일 다시 장전점(長箭 店)으로 귀환, 그 후 그 곳에서 경비에 임하였다. 족달지대(足達支隊)의 행동에 책응하여야 할 재(在) 춘천 경택중대(境澤中隊)는 그 주력을 홍천(洪川)으로 진출시켜 동지 부근을 소탕 중이었으나, 7일 폭도 약 6백이 둘로 나뉘어 남 북 양방면에서 홍천(洪川)을 습격하였다. 중대는 일부로써 남방에서 오는 폭도를 막게 하고, 주력은 북방에서 내습하는 폭도를 공격하여 이것을 인제(麟蹄)·횡성(橫城) 2방면으로 격퇴하 였다. 폭도는 시체 20을 유기하고 우리 부대의 급추격에 견디지 못해 사산하여 산중으로 도망쳤다. 하림지대장(下林支隊長)은 원주(原州) 부근에 있는 폭도의 일부가 원주(原州) 동방 약 20 리에 있는 갈곡(葛谷) 고지 위에 약 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 5채 및 산병호(散兵壕)·녹 시(鹿柴) 등을 구축 중이라는 정보를 듣고 8일 다기소대(多崎小隊)를 파견 동지방의 폭도를 구축하고 건물을 소각했다. 9일 홍천(洪川)에 있던 경택중대(境澤中隊)가 춘천(春川)으로 귀환하자 다음 10일 약 2백 의 폭도가 재차 홍천(洪川)을 습격 그것을 소각하였다. 또 그날 약 4백의 폭도가 낭천(狼川) 을 습격 군아(郡衙)의 총기 탄약을 약탈하고 기타 가평(加平) 부근에 폭도가 출몰하여 춘천 (春川) 주위에 적세가 왕성하여졌다. 19일 경택 중대(境澤中隊)는 경성(京城)에서 파견된 보 병 제52연대 제1, 2중대(長謙田大尉)와 교대하고 경성(京城)으로 귀환하였다. 20일 춘천(春 川) 남방 약 10리인 정족(鼎足) 부근에 약 3백의 폭도가 출몰함을 알고 겸전중대(謙田中隊) 는 부하 2소대로 토벌케 하여 그 5명을 죽이고 동방 대룡산(大龍山)으로 궤주시켰다. 울진(蔚珍) 부근 폭도를 토벌하기 위하여 재삼척(在三陟) 파견대는 일 선해환(扇海丸)을 타 고 해로(海路) 울진에 상륙 전 원주(原州)진위대 부(附) 보병 참령 박준성(朴準成)이 지휘하 는 폭도 약 1백 명을 공격 궤란에 빠뜨리고 동일 오후 삼척으로 귀환하였다. 금강산 장안사(長安寺)를 근거로 하는 적괴(賊魁) 동고록(董高錄)은 폭도 약 4백을 이끌고 화천(化川)·북창(北倉)·인제(麟蹄)·양구(楊口) 부근에 걸쳐 출몰 약탈하므로 원산(元山) 보병 제50연대에서 중야중위(中野中尉)가 인솔한 1소대를 그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그 소대는 13일 원산을 출발 철령(鐵嶺)·회양·(淮陽)·화천(化川)·북창(北倉)을 경유, 19일 장안사(長安 寺)에 도착 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약 3일 전에 통구현리(通口鐵里) 방면으로 도주한 후이었 으므로 다시 장전점(長縣店)으로 나와 해안선을 따라 원산(元山)으로 귀환하였다. 충주수비대는 폭도 수색을 위하여 17일 이궁소대(二宮小隊)를 노음면(老陰面) 및 음성(陰 城)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그 소대는 도중 좌악리(佐樂里 ; 노음면 남방 약 10리) 및 원대 (院垈)에서 각 약 30의 폭도를 기습, 그것을 궤주시키고 원대(院垈)의 소굴을 소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