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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강릉에 두고 평창(平昌) 부근에 있는 족달지대(足達支隊)의 분견대와 연락하여 구간령(久間 嶺) 부근의 적도를 진압하였다. 족달지대(足達支隊)와 책응하여야 할 재안동(在安東) 서강중대(西岡中隊)는 진보(眞寶) 부 근을 토벌한 후 영주(榮州)로 진출하였다. 27일 풍기(豊基)로 전진할 때 마침 동지 경무분견소를 습격, 우리 경관 1명을 참살한 폭도 약 3백과 충돌, 그것을 서방으로 격퇴시켰다. 그런데 폭도는 오후 11시경 중대가 취사를 하고 있을 때 재차 대세(隊勢)를 정돈하고 역습하여 와서 약 1시간 교전 후 쌍방이 다 같이 현상대로 철야하고, 다음 28일 오전 5시부터 중대는 공격을 개시 이것을 서남방으로 격퇴 하였다. 그 후 그 부근을 소탕하고 영주(榮州)로 귀환하였다. 이 폭도는 29일 순흥(順興)경 무분견소를 31일에는 봉화(奉化)경무분견소를 습격, 그것을 소각하는 등 횡포를 극하였다. 30일 청주(淸州)에서 충주(忠州)로 탄약·양식을 수송 중이었던 호위 하사 이하 7명은 괴산 (槐山) 남방 약 2000m 지점인 남정자(南亭子) 부근에서 폭도 약 3백에게 급습을 당하여 탄 약 양식을 유기하고 청주로 퇴각하였다. 또 족달지대(足達支隊)에서 파견된 괴산 분견대도 동일 폭도의 습격을 받아 충주로 퇴각하였다. 이에 있어 재 충주 족달지대장(足達支隊長)은 보병 제 47연대 제6중대장 성호기대위(城戶崎大尉)에게 보병 2소대를 주어 괴산(槐山)으로 급행시켰다. 이 부대는 31일 오전 3시 괴산(槐山) 동단(東端)에 도착, 폭도가 동지에 노영하 고 있음을 찰지(察知)하고 맹렬히 이를 기습하여 궤란으로 몰아넣고, 동시에 전일(前日) 폭 도에게 빼앗겼던 탄약·양식의 대부분을 회수하였다. 폭도는 시체 40을 유기하고 사방으로 산란하였다. 이상, 각대의 협동 동작은 대개 원활치가 못하여 토벌의 효과가 현저하지 못했음은 각대가 파견된 지방 상호의 거리가 멀고 전기적통신(電氣的通信)을 못하여, 지방에 있어서는 전혀 타 부대의 행동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연락에 중점을 두지 않게 되어 비목(鼻目)간에 접근 하였을 때에도 연락을 하지 않고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동작을 하는 기관(奇觀)을 나타낸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개 집단적으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경계망이 엉성하여서 마 치 같은 지방을 시일을 따로 하여 시위적 행동을 취한 것 같은 결과를 보여 도리어 폭도로 하여금 예봉을 피하기 쉽게 만든 느낌이 있었다. 또 야간 행동은 노고만 많았을 뿐 도리어 폭도의 행동에 자유를 준 것 같았다. 제2장 9월에 있어서의 폭도 토벌 1. 강원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족달지대(足達支隊)에 속하는 재 영월(寧越) 보병 제51연대의 석흑중대(石黑中隊)는 순흥 (順興)·풍기(豊基)·단양(丹陽) 방면을 소탕하고, 9월 3일 영월군(寧越郡) 하동면(下東面) 밀동 (密洞)에서 폭도 약 1백과 조우(遭遇), 그것을 격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