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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 빠뜨린 이래 점차 증가하여 그 수 6백에 달하고 충주(忠州)를 점령하겠다고 호언하였다. 22 일 오전 9시경 2부로 나뉘어, 그 하나는 제천(堤川)·청풍(淸風) 가도를, 주력은 제천(堤川)· 주포(周浦) 가도를 잡아 충주(忠州)를 향하여 출발하고, 또 그날, 오후 강릉(江陵)에서 왔다 고 칭하는 폭도 약 2백은 오후 6시 충주를 향해 전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족달지대(足達 支隊)가 제천으로 전진 중 극히 소수의 폭도와 조우하였을 뿐이었던 것은 폭도의 경계가 교묘하여 우리 예봉을 피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이들 폭도는 수괴 민긍호(閔肯鎬)의 부하들 로, 23일 오전 11시 30분경부터 과연 충주를 습격하였으나 동지 수비대장의 적당한 배비 (配備)로 인하여 격퇴당하고, 사상 20여를 내고 대부분은 충주·청풍 가도 방향으로, 일부는 장호원 방향으로 퇴각하였다. (삽화 제10 참조) 이래 여주(驪州)는 민후(閔后)의 출생지로서 그 횡사 이래 배일사상이 극히 왕성한 곳이었 다. 그런데 이번에 폭도가 봉기하자 그에 가담하여 탄약 양식 등을 공급하는 경향이 있었으 므로, 재 원주 하림(下林) 지대장은 답곡대위(畓谷大尉)가 인솔하는 중대를 24일 동지에 파 견하여 폭도에 편드는 부락을 소각시켰다. 불파토벌대(不破討伐隊)는 소류중대(小柳中隊)를 죽산(竹山)·음죽(陰竹)을 거쳐 능촌중대(能 村中隊)는 양지(陽智)·이천(利川)을 거처 각기 부근을 소탕하면서 전진, 26일 장호원에서 서 로 만나 여주(驪州)·지평(砥平)·이포(梨浦)·이천(利川)을 소탕하고, 30일 이천(利川) 서방 약 2000m인 설봉산(雪峰山) 부근에서 원(元) 시위 보병 제1연대 중대장 허준(許俊)이 인솔하 는 약 1백의 폭도를 궤주시키고, 31일 토벌대의 편성을 풀고 각 수비대로 귀환하였다. 전선수리(電線修理) 호위로서 경성(京城)에서 이천 방면으로 파견한 중촌소위(中村少尉)가 이끄는 1소대는 30일 이천 북방 고지에서 약 4백의 폭도와 조우 그것을 격파하였다. 폭도 의 일부는 광주 가도로 패주하고, 그 주력은 설봉산 방면으로 궤주하여 불파(不破)토벌대에 게 다시 타격을 받았다. 불파토벌대에 책응할 임무를 띠고 경성에서 양근(楊根)·이천(利川) 방면으로 파견된 명석중 대(明石中隊)는 23일 양근(楊根)에 도착, 24일 양근 동북 약 20리에 있는 폭도의 소굴인 장 수동(長壽洞) 연안막(蓮安幕)을 습격, 궤란하는 폭도를 추격하여 용문사(龍門寺) 근거지를 무찔러 장래의 화근을 끊기 위하여 그것을 소각해 버렸다. 폭도는 사상 50을 유기하고 산 란하였다. 27일 광탄(廣灘)으로 전진하고, 30일에는 산지동(山地洞 ; 광탄 북방 약30 리) 서북방 약 10리의 무명촌(無名村) 및 고조리(古兆里)에 있는 약 5백의 폭도를 엄습하여 대타격을 주었 다. 폭도는 사상자 1백 여를 유기하고 문호(汶湖) 방향으로 도망쳐, 9월 3일 우리 추격에 견디지 못해 드디어 사방으로 산란하였다. 중대는 동일 고안(高安)에서 숙영하고 5일 경성 (京城)으로 귀환하였다. 삼척(三陟)에 상륙한 우진강대위(宇津江大尉)가 이끄는 1부대는 24일 정선(旌善)으로 향하 여 전진, 28일 영월(寧越)로 들어가 족달지대(足達支隊)의 주력과 연락하고, 그 후 주력을 삼척(三陟)에 두고 울진(蔚珍)·고직령(古直嶺) 방면을 수색하였다. 강릉파견대도 그 주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