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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족달지대(足達支隊)는 18일 오전 11시 조치원에 하차, 청주(淸州)로 향하였다. 청주 이북 은 일반으로 불온하여 음성(陰城)·괴산(槐山) 부근에 폭도 집합의 정보가 있어, 지대는 주력 으로써 음성(陰城)을 1중대로써 괴산(槐山)을 거쳐 도중 폭도와 조우하는 일 없이 21일 밤 충주에 도착하였다. 생각컨대 폭도는 그 관용수단(寬容手段)을 써서 양민으로 분장하고 혹 은 산곡(山谷)에 은도(隱逃)하였을 것이다. 21일 경택대위(境澤大尉)가 인솔하는 1소대는 춘천(春川)에, 우진강대위(宇津江大尉)가 인 솔하는 1부대는 삼척(三陟)에 도착하여 각각 소명(所命)의 배비(配備)를 취하였다. 양말(糧 秣) 호위로서 경성(京城)을 출발하여 충주(忠州)로 향한 보병 제 50연대의 하사 이하 7명은 20일 장호원(長湖院) 동남방 약 10리쯤 되는 촌락에서 약 3백의 폭도에게 포위되어 가까스 로 이를 격퇴하고 충주에 도착하였다. 22일 충주(忠州)를 출발 귀로 선편(船便)으로 한강 항행중 여주(驪州) 하류 약 40리에 있는 이포(梨浦) 부근에서 양안(兩眼)으로부터 약 80명 의 폭도에게 습격을 받아 우리 병졸 1명이 전사하고, 분대는 상륙하여 그 폭도를 공격하려 고 하자 폭도들이 육박해 와 이에 격투가 시작되어 그 십여 명을 죽였으나, 적은 더욱더 증가하여 중과부적으로 일조(一條)의 혈로를 열고 여주 방향으로 퇴각하였다. 24일 여주에 도착, 26일 경성(京城)에 귀환하였다. 21일 군사령관은 이천(利川)·장호원(長湖院)·여주(驪州)방면 토벌을 위해 다시 재 대전(在大 田) 보병 제14연대 제3대대장 불파소좌(不破少佐)에게 제9중대 소유(小柳)대위 및 수원을 수비하고 있는 제3중대 야촌(野村) 대위를 배속시켜 그 방면으로 파견하고, 또 동시에 재 경성(在京城) 보병 제51연대 제9중대를 양근(楊根)·이천(利川) 방면으로 파견, 불파토벌대 (不破討伐隊)에 책응시켰다. 족달지대(足達支隊)는 우선 제천(堤川)과 영월에 있는 폭도를 진압하기 위하여 2종대(二縱 隊)가 되어 22일 오후 3시 충주(忠州)에서 떠나, 그 주력은 청풍(淸風)을 거쳐 제천(堤川)으 로, 보병 제52연대 제2중대는 주포(周浦)를 거쳐 제천(堤川)으로 향하게 하였다. 또 따로 1 소대를 장호원(長湖院) 방향으로 파견하여 대전(大田)에서 나오는 불파토벌대와 책응시켰다. 원주에 있는 하림지대(下林支隊)의 행동에 책응하기 위하여 좌등대위(佐藤大尉)에게 보병 1 중대(1소대 결)와 기관총 2를 주어 안흥(安興)을 거쳐 평창(平昌) 방향으로, 또 평도중위(平 島中尉)에게 보병 1소대와 공병 약간을 주어 주천(酒泉) 방향으로 파견하였다. 족달지대(足達支隊)의 주력은 도중 폭도와 조우하는 일 없이 22일 청풍(淸風)에, 23일 오 전 6시에는 제천(堤川)에 도착하였다. 주포(周浦)·제천(堤川)길을 전진하던 제2중대는 박달 령(朴達嶺) 부근에서 악 1백 명의 폭도와 만나 이를 구축하면서 전진하였다. 23일 오전 5 시에 제천(堤川)에 도착, 촌락에 의거하여 저항하는 약간의 폭도를 격파하여 그 30명을 죽 이고 본대에 합류하였다. 이래 제천(堤川)은 폭도의 근거지로서 전촌이 폭도의 편을 들어 그 북방 고지에는 산병호(散兵壕)가 구축되어 있었다. 지대장은 장래의 화근을 제거하기 위 하여 촌락의 대부분을 소각해 버렸다. 제천에 있는 폭도는 15일 하림지대(下林支隊)에서 내어 보낸 말안소대(末安小隊)를 곤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