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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 족을 참살하고, 토민을 선동 유혹하여 무리를 모으고 음죽(陰竹)을 거쳐 장호원(長湖院)에 이르러 그 수 1천이라 칭하여 양민을 위협하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이들 정보는 용 이하게 원주 지대장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군사령관은 강릉 부근 해안선 일본 거류민 보호를 위해 원산(元山)수비대에서 보병 제50연 대 제11중대장 전중대위(田中大尉)를 파견하여 폭도 진압을 명하였다. 그 부대는 군함 갈성 (葛城)에 편승하고 12일 원산을 출발, 13일 강릉(江陵)에 상륙, 그 지방 부근을 경비하였다. 15일 하림지대(下林支隊)에서 정찰을 위하여 평창(平昌) 방면으로 나갔던 좌등(佐藤)대위가 인솔하는 제11중대(1소대 결)의 척후는 방림역(芳林驛)에서 강릉 파견대에서 나온 척후와 연락하였다. 또 동시에 제천(堤川) 방면으로 나간 말안중위(末安中尉)가 인솔하는 1소대는 그날 밤 제천(堤川)에서 폭도 약 3백50과 충돌, 교전 4시간 후 겨우 그들을 격파하였으나, 밤중에 재차 포위를 당하여 탄약이 다하도록 교전하다가 충주로 퇴각하였다. 그날 폭도 약 3백이 죽산(竹山)을 습격 일본인을 참살하고 횡포·약탈을 자행하였다. 16일 충주(忠州)수비대에서 파견한 전선(電線) 검사의 호위병 임(林) 이하 6명은 장호원(長 湖院)에서 폭도와 만나 겨우 격퇴하였으나 인부 2명이 살해되었다. 충주에는 이궁소위(二宮少尉)가 인솔하는 1소대가 수비하고 있었으나 그 지방 부근이 더욱 더 불온지므로 강기(岡崎) 제13사단장은 재경 보병 제51연대에서 노택대위(蘆澤大尉)가 인 솔하는 1소대를 증파하였다. 이 부대는 16일 경성(京城)을 출발 충주(忠州)로 향하는 도중 18일 오후 장호원(長湖院)에서 약 1백50의 폭도와 만나 그것을 궤란시키고 19일 충주(忠 州)에 도착하였다. 경성(京城)에서 전선 검사를 위하여 파견한 공병 1분대는 19일 이천(利川) 동남 약 20리 지점에서 폭도의 습격을 받아 가까스로 그것을 격퇴하였다. 원주(原州)와 충주(忠州) 부근의 폭도의 세력이 일익 창궐하여 각지로 전파되는 상태에 있 어, 이에 대한 하림지대(下林支隊)의 행동이 여의치 않았으므로, 군사령관은 장래를 고려하 여 맹렬하게 응징적 토벌을 실시할 필요성을 인정, 보병 제51연대 부족중좌(附足中佐)에게 동 연대 제2대대 (2중대 결) 보병 제52연대 제2중대, 기관총 4, 기병 제17연대 제3중대의 1소대, 공병 1소대를 주어 지대를 편성하여 18일 경성(京城)을 출발, 조치원까지 철도 수송 을 하고, 그 후 충주(忠州)를 거쳐 청풍(淸風)·제천(境川)·영월(寧越)·평창(平昌) 부근의 폭도 소탕을 명하였다. 그리고 그 지대장은 충주 도착 후는 충주수비대 및 하림지대(下林支隊)를 지휘하고, 또 필요에 따라서는 강릉 파견대까지도 지휘시켰다. 동시에 재경성(在京城) 보병 제51연대에서 경택대위(境澤大尉)가 인솔하는 1소대를 춘천수비대에 증가하여 그 주력을 홍천(洪川) 부근으로 진출시키고, 원산(元山) 수비 보병 제50연대에서 우진강대위(宇津江大 尉)에게 1중대와 기관총 2를 주어 해로 삼척(三陟)으로 파견하여 그 주력을 정선(旌善) 부 근으로 진출시키고, 또 재 대전(大田) 보병 제14연대에서 안동 부근으로 파견한 서강대위 (西岡大尉)가 인솔하는 제11중대(1소대 결)는 그 주력을 영주(榮州)로, 일부를 고직령(高直 嶺) 부근으로 진출시켜 각기 족달지대(足達支隊)와 책응하여 동작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