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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였다. 소창 대위는 부하를 이끌고 상륙을 강행, 반란병을 구축하고 갑곶동 북측 고지를 점 령하고 다시 계속 추격하여 강화부 동문 밖에 이르렀다. 반란병은 폭민과 합쳐 그 수 약 8 백에 달하여 성벽에 의거 견고하게 방어하고 있을 때, 이미 일몰이 되어 소대의 일부로써 동문 부근의 감시를 담당시키고 주력은 갑곶동 북측 고지에서 야영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아군은 즉사 6, 부상 5를 냈다. 11일 새벽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오전 7시경 폭도의 일부는 총기를 버리고, 대부분은 그것 을 휴대하고 사방으로 궤주하기 시작하여 소대는 성내로 돌진, 동부를 점령하고 무기 탄약 의 압수, 폭도 검거에 착수하였다. 10일 강화도분견대가 반란하였다는 연락을 받은 군사령관은 보병 제14연대 제1대 대장 적 사소좌(赤司小佐)에게 제1·제3중대, 기관총 2, 공병 1소대를 주어 진압시키도록 명하였다. 동대는 11일 오후 6시 강화도에 상륙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진압된 후이었으므로 선견 소대 와 협력 12일 미명부터 폭도의 수색 질서 회복에 힘쓰고 1중대를 수비로 잔치(殘置)하고 13일 용산(龍山)으로 복귀하였다. 제4편 명치 40년(1907년;편자 주) 지방에서의 폭도 토벌 제1장 8월 강원도·충청북도 및 그 부근에서의 토벌 8월 1일 군대 해산의 소식이 강원도 원주 진위대에 달하자 전편 제2장에서 말한 바와 같 이 대대장 홍우형(洪祐馨)이 상경한 후 전병원(全兵員)이 모두 폭도화하여 원주를 약탈하고, 8월 5일에는 병영에서 탈주하였다. 김덕제(金德濟)는 그 일부를 이끌고 평창(平昌)·강릉(江 陸) 방면에서 양양(襄陽)·간성(杆城)·고성(高城)·통천(通川)·흡곡(歙谷) 지방에 걸쳐 도량하고, 민긍호(閔肯鎬)는 전체의 수괴가 되어 수다한 소집단(小集團)으로 분할하여 제천(堤川)·충주 (忠州)·죽산(竹山)·장호원(長湖院)·여주(驪州)·홍천(洪川) 등 각 지방으로 은현출물(隱顯出沒) 하여 횡포를 자행하였고, 이와 부화뇌동한 무뢰한도 많아 허준(許俊)·이경삼(李京三)·김만군 (金萬軍)·고석이(高石伊)·김군필(金君必)·이한창(李韓昌)·한기석(韓基錫)·한갑복(韓甲復)·윤기영 (尹起榮)·이강년(李康䄵)·김생산(金生山)·변학기(邊鶴基)·조인환(曺仁煥) 등이 그 주된 자다. 원주진위대 반란이란 보고를 접한 군사령관은 6일 재 경성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장 임소 좌(林少佐)를 지휘관으로 한 보병 2중대, 기관총 4, 공병 1소대로 된 1지대를 편성하여 원 주 부근 진정을 일임하였다. 지대(支隊)는 7일 경성(京城)을 떠나 도중 폭도와 조우(遭遇)하지 않고 이수두(二水頭)·지평 (砥平)을 거쳐 10일 원주에 도착, 지형을 살피자 토민의 비호를 받고 있는 그들 폭도의 첩 보(諜報) 근무는 극히 민활하여 교묘하게 우리 행동을 탐지하고 은현 출몰하므로, 지대는 원주 도착 후 그 부근 소탕에 힘썼음에도 불구하고 수일 동안 조금도 얻은 바가 없었다. 12일 약 2백의 폭도가 여주(驪州)를 습격하여 경무분견소를 포위하여 일본경찰관과 그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