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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 있었으나 대개 평온리에 해산하였다. 3. 원주진위대의 반란 8월 1일 군대 해산의 풍평(風評)에 이어 경성시위대의 반란과 기타의 와전(한병 및 충의의 국민은 전부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이 원주진위대에 달하자 영내 일반이 동요를 일으 켜 대대장 참령 홍유형(洪裕馨)은 극력 부하를 훈유하였으나 도리어 부하의 반항심을 높였 다. 대대장 홍이 8월 2일 군부의 전명(電命)에 의하여 상경하자 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閔 肯鎬)는 불평 동지들을 선동하여 대대장 대리 정위(正尉) 김덕제(金德濟)를 협박하여 여당으 로 삼은 다음 전원이 폭도화하여 총기 탄약을 분배하고 지방 무뢰한들까지 규합하여 무기 를 주었다. 일부는 8월 3일 대대장 홍을 도중 지평(砥平)에서 만나 대대를 지휘하여 경성으 로 진출하라고 협박하였으나, 홍은 그들을 속여 밤중에 여주(驪州)로 도망쳐 난을 면하고 상경할 수가 있었다. 또 다른 일부는 같은 날 죽산(竹山)에 이르러 동지를 규합하고, 그 대 부분은 원주 일본 거류민 및 경무분견소를 습격 가옥을 파괴하고 약탈을 자행하고 동지의 규합 등 횡포를 극하였다. 8월 5일 충주 수비대장 이궁소위(二官少尉)는 부하 19명을 인솔 하고 정찰차 막 원주로 들어가려다가 반란병과 폭도에게 들켜 교전 약 2시간 후 원주 서방 고지로 피난하고 있는 거류민 및 경무관을 수용하여 충주로 귀환하였다. 폭도로 화한 반란 병 및 폭민은 동일 이후 몇 개의 부대로 나뉘어 각 지방을 횡행 약탈하고, 원주 병영에는 한 사람의 병졸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민긍호(閔肯鎬) 김덕제(金德濟) 등이 폭도의 수괴 가 되어 교묘하게 우리 토벌대의 예봉을 피하여 적염(賊焰)의 진정을 오래 끌게 한 사항은 제4편에서 상술하겠다. 4. 강화도(江華島)분견대의 반란 강화도분견대는 비교적 군기(軍紀)가 정립되고 기개도 있었다. 군대 해산의 소식이 전하여 지자 분개하는 마음을 걷잡지 못하고 있을 때 원 진위대 참교(叅校) 유명규(劉明奎)라는 자 가 있어 군수와 일진회원(一進會員)을 강화부 동문 밖에서 모살(謀殺)하고 줄기차게 분견대 병졸을 선동하였다. 이 교사(敎唆)로 영내가 동요되어 장교의 진무를 듣지 않고 무기고·탄약 고를 깨고 총기 탄약을 탈취하여 지방 폭민들과 휩쓸려 반란을 일으켰다. 이상과 같은 상황을 조금도 모르는 진위대 교관 소창대위(小倉大尉)는 분견대 해산의 임무 를 띠고 대기소위(大崎少尉) 이하 보병 1소대 기관총 2를 이끌고 8월 10일 경성(京城)을 떠나 인천에서 수로(水路) 강화도로 향하였다. 오후 4시 갑곶동(甲串洞)에 도착 상륙지 부근 의 상황을 시찰하였으나, 아무런 이상도 없었으므로 막 상륙을 개시하려고 하였을 때 갑곶 동 동측 성벽에 잠복하고 있던 반란병 약 50이 돌연 총안(銃眼)으로 맹렬한 사격을 개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