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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 의 제2·제3대대, 기병대·포병대 및 공병대 등은 명령대로 훈련원(경성 동대문 연병장에 있 다)에 이르러 해산식을 실시하고, 동시에 사금(賜金)을 수령하고 해산하였으나,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참령 박승환(朴昇煥)은 대장 소집 때 징병하고 불참, 대리로서 고참 중 대장을 열석시켰다. 이것은 미리 일의 내용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대리가 귀영 하여 군대 해산의 조칙을 보고 하여도 일실(一室)에 농거해 있으면서 나오지 않아, 대대장 대리는 가까스로 병원(兵員)을 집합하여 해산식장으로 떠나려고 하는 순간 한 발의 총성은 대대장의 자살을 알리고, 동시에 집합하였던 각 중대는 갑자기 동요를 일으켜 탄약고를 파 괴하고 탄약을 분배, 혹은 몰래 감추어 가지고 있던 탄약으로 곧 일본 교관에게 덤벼 옥상 과 창에서 사격을 개시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 옆에 있던 시위 보병 제2연대 제1대대도 총 성에 응하여 곧 혼란 상태를 빚어내 양 병영이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켜, 영외 주위에 감시 병을 배치하고 시가를 향해 난사를 퍼부었다. 이때 마침 전기 병영을 수령(受領)할 임무를 띠고 파견된 보병 제51연대 제10중대(1소대 결)는 이 사격을 받아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 대대 정문 부근에서 서로 대치하였다. 강기사단장(岡畸師團長)은 군사령관의 명에 의하여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장 판부소좌(坂 部少佐)에게 제9중대 기관총 및 공병 약간을 주어 양 병영의 진압을 명하였다. 동 소좌는 오전 10시 20분 시위 보병 제2연대 제1대대 후문을 향해 공격을 개시, 남대문 누상(樓上) 에 배치한 기관총 2의 협력을 얻어 장병과 창안에 있는 한병을 맹렬하게 사격하였다. 오전 10시 40분 제12중대가 증원되고 제10중대 역시 정문을 향하여 공격 전진하였다. 제9중대 장 미원대위(梶原大尉)는 이미 부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신(挺身), 부하를 이끌고 영내로 돌진 순간 저격을 받아 전사하였으나, 공병대 제12중대가 이에 속행하여 공병은 병영의 일 부를 폭파하고 보병은 백병(白兵)으로 한병을 영외로 구축하여 오전 10시 50분 병영 전부 를 점령하였다. 궤란된 한병은 사방으로 분산하여 그 일부는 소의문(昭義門) 밖 야소교회당 고지에서 우리 남대문 정거장 위병을 향해 사격을 가해 왔으나 곧 격퇴하였다. 이 전투에 있어서 아군의 손해는 전사 미원대위(梶原大尉) 이하 4명, 부상 장교 이하 21명이고, 한병(韓兵)의 전사는 장교 이하 70여 명, 부상은 장교 이하 1백4명, 포로 6백 명이었다. 이렇게 하여 경성 시가 는 곧 평정으로 돌아갔으나 해산한 군인의 대부분은 지방으로 도망쳐 폭도의 무리에게 투 신, 오래 화근의 불길이 종식되지 않은 불씨가 되었다. 2. 지방진위대(地方鎭衛隊)의 해산 지방진위대 해산을 위하여 8월 1일 전보로 각 대대장을 경성(京城)으로 소집, 군부에서 대 신으로부터 조칙을 전달하고 동시에 은사금(恩賜金)을 휴행 귀대시켜 해산을 실시, 8월 3일 수원 진위대의 해산을 비롯하여 9월 3일 북청(北靑)진위대의 해산으로써 종결하였다. 그리 고 그간 강원도 원주진위대 및 경기도·강화도 분견대의 반란이 있었던 외에는 다소 동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