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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 그 진압을 위임하였다. 통감은 평양징상대(平壞徵上隊 ; 황제의 신임이 두터운 시위 보병 제2연대 제3대대로 포 덕문(布德門) 밖에 있었다)가 그날 함 12시를 기하여 포덕문에서 왕성으로 진입하려는 기도 가 있음을 알고 군사령관에게 그 제지를 명하였다. 군사령관은 곧 재경성(在京城)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를 시켜 포덕문을 점령하고 징상대 의 입문을 방지시키고, 나머지 재경 제부대에 긴급 집합을 명하여 군사령부로 모으고 야포 병(野砲兵) 중대는 왜성대(倭城臺)에 포진을 펴도록 명령하였다. 한황(韓皇)은 그날 밤 늦게 그 시종무관(侍從武官)으로 하여금 한국 군대를 순시시켜 소요 를 일으키지 말도록 설득을 하였다. 시위여단장(侍衛旅團長)은 각 대장에게 명하여 병졸에 게 지급하였던 탄약을 반납시켰다. 동시에 한황은 정령(正領) 어담(魚潭)을 군사령부로 보내 포덕문 부근 일본병의 철거를 요구하였으나, 군사령관은 평양징상대의 불온한 기도가 있음 을 지적하고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군사령관은 그날 밤 영(英)·미(美) 양국 영사관에 호위병을 보내 그것을 보호하였다. 20일 오전 9시 위 양식 끝나다. 이보다 앞서 군사령관은 사변에 대비하기 위해 청양수비대에서 보병 1대를 경성(京城)으로 소치(召致)하였다. 그 부대는 20일 아침 경성(京城)에 도착 하였다. 이날 아침부터 성내는 정온하여 정오가 되어도 아무런 폭동의 징후가 없었으므로, 그때부 터 왕성(王城) 부근을 점령하고 있던 보병 2중대 군사령부 안에 있던 보병1중대 및 왜성대 부근의 포병 중대는 그 위치에 머무르게 하고 다른 부대는 각기 숙영지(宿營地)로 복귀시켰 다. 이에 따라 상황은 재차 불온화되어 ‘결사회’라 칭하는 일단의 군집이 남대문에 나타나 “폐하는 오늘 일본으로 출발” 운운하고 외치며 남대문 정거장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발걸음 을 돌려 서소문 밖에 있는 총리대신 이완용의 저택을 불사르고, 삼삼오오 광화문에 이르러 거기서 각 대신이 의정부(議政府)에서 돌아가는 귀로를 습격하려다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오후 4시 북서전동(北署磚洞)에 있는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의 저택을 경호하고 있던 경 무청원의 사격에 의하여 사산하였다. 그날 시위보병대 병졸 약 30명이 종로 순사 파출소를 향해 사격을 감행하다가 우리 군대 가 나타나자 곧 도주하였다. 남대문·서대문 양 정거장, 서대문 밖에 있는 일본 포병영의 소각 및 한강 철교 파괴 등이 빈번하였다. 시위보병 제2연대 제2대 [창광동(昌廣洞)에 있음]의 병졸은 무질서하여져 점차로 창을 파 괴하고 기타 소란을 피웠으나 극력 이를 진무시킨 데 반하여, 폭민은 그 부대를 창가로 접 근 격려 도발하였다. 따라서 하사 이하 인심이 동요되어 우리 기병 척후를 향해 돌을 던지 고 혹은 영내에서 저격하였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경성위수사단(京城衛戍師團)은 1소대를 양 정거장에 파견하고 따로 농상공부대신 송병준(宋秉畯)·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의 저택에 보기병(步騎兵)을 파견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