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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 궁중을 원천(源泉)으로 하는 배일(排日)에 관한 각종 음모는 재외망명자(在外亡命者) 재경 파역대관(在京罷役大官) 및 기타에 의하여 끊임없이 강구되어 왔다. 마침내 명치 40년(1907 년;편자 주) 7월 3일 소위 밀사라 칭하는 전참찬(前叅贊) 이상설(李相卨)·전평리원검사(前平 理院檢事) 이준(李儁)·재로공사관(在露公使官) 서기관 이위종(李瑋鍾) 등 3명은 해아(海牙)에 서 만국평화회의에 참렬(叅列)을 요구하는 사건이 폭로되어 크게 일본의 여론을 격앙(激昻) 시켜, 우리 정부는 임외무대신(林外務大臣)을 한국으로 파견, 마침내 황위의 선양(禪讓) 및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의 발표에 이어 군대의 해산을 보게 되었다. 밀사사건이 보도되자 한국 조정의 상하는 대경실색, 원로대신 수십 명은 그 실체(失體)에 관하여 통감(統監)에게 애원서를 드리고, 재야 중요 단체(일진회 제외)도 역시 원로 17~18 명의 연서로 통감에게 애소하였다. 통감은 엄연히 함구하고 이에 대답이 없었다. 이에 있어 경성(京城)의 상하는 축일(逐日) 비분 우려의 빛이 짙어져 갔다. 우리 정부는 한국의 불법에 관하여 대처할 방침이 결정되어 사변(事變)에 응할 만반준비를 완료하였다. 시국이 점차 진전되자, 7월 17일부터 경성(京城) 시중의 상황은 불온상태로 기울어져, 종 로(鍾路) 기타 곳곳에 ‘임진란을 보라! 을미지사(乙未之事 ; 민비 암살건)는 여하?’ ‘일본인 의 포학은 저지할 바를 몰라 우리들의 도탄은 안전(眼前)에 있다’ 등의 벽보를 붙이는 자가 있었다. 다음 18일에 이르러서는 황제가 양위되어 일본으로 잡혀간다는 설이 전하여지자, 시중은 더욱 더 불온한 광경을 나타내어, 종로 부근 주요한 거리에서는 각호가 폐점(閉店) 하고, 야간이 되자 다수 한인이 종로로 모여 비장 극렬한 언사로써 ‘이번 사건은 국가의 안 위에 관한다’ 운운, 노방연설을 하고 ‘사직이 위태롭다’고 통곡을 하고, 나라의 종말을 외치 며 울부짖었다. 오후 11시경이 되자 군중은 점차 왕성(王城) 부근으로 모여들고, 또 왕성 대한문(大韓門) 북방 도로상에 결사회(決死會)라 칭하는 일군은 결사 연맹부를 작성 가맹자 를 모집하고 있었다. 18일 밤, 황제 양위 결정되다. 19일 아침부터 많은 한민(韓民)이 종로에 군집하여 광태(狂態)를 연출하고 혹은 격렬한 노 방연설을 하며, 혹은 한국 군대를 향해 그 기개가 없음을 책하여 은근히 폭동을 도발하고, 혹은 경찰관의 제지에 항거하여 부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그때 마침 시위보병 제1연대 제3대대의 병영으로 가서 거짓 ‘황제는 지금 일본으로 잡혀가느라고 인천으로 향하는 중이다.’ 고 전한 자가 있어 그 소식을 들은 한병(韓兵) 약 1백 명은 간부의 제지도 듣지 않고 병영 에서 탈출, 2대로 나뉘어 1대는 종로 순사 파출소를 습격, 그것을 파괴하고, 다른 1대는 경 비에 종사하고 있는 경찰관을 사격하여 경찰관 및 일한(日韓)인 수명을 사상시켰다. 그날 밤 폭도의 일군은 일진회(一進會)의 기관지 국민신문사(國民新聞社)를 습격, 건물을 파괴하고 사원을 구타 부상시키는 등 횡포를 극했으나, 우리 병력의 경비로 대사에 이르지 않고 중지되었다. 한국선제(韓國先帝)는 이 날 폭동발생을 우려하여 이등통감(伊藤統監)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