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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 극하였다. 폭도가 태안군에서 봉기하자 전주경무고문지부(全州警務顧問支部)는 경찰관을 파견 수괴를 잡으려 하였으나, 그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다시 일한경찰관(日韓警察官) 일행 9명을 순창 (淳昌)으로 파견, 그를 추급(追及)하였으나 도리어 폭도에게 포위를 당하는 비경(悲境)에 빠 지고 말았다. 여기서 폭도는 동복(同福)·곡성(谷城) 방면에서 다시 순창(淳昌)으로 진출한 시 기를 이용 6월 11일 남원(南原) 및 전주(全州)의 진위대를 풀어 전주(全州)·남원(南原)·광주 (光州)의 방면에서 요로(要路)를 차단하고 순창을 포위시켜 교전, 반일(半日) 만에 폭도는 기진맥진 전원 투항하였다. 16일 우리 헌병은 최 이하를 경성으로 압송하고 8월 4일 최익현을 감금 3년에, 신보균을 동 2년에 처하고, 이하들도 각각 처벌하고, 최는 대마도(對馬島)에서 복역하다가 40년 1월 형지(刑地)에서 병사하였다. 제3장 경상북도에서 일어난 폭도 토벌 폭도의 수괴 김도현(金道鉉)·신돌석(申乭石)·정용기(鄭鏞基) 및 이하현(李夏鉉)은 원래 화적 (火賊)의 두령으로서 성질이 포악한 무뢰한이었으나, 민종식(閔宗植)과 최익현(崔益鉉) 등과 간접적으로 기맥을 통하여 이름을 의병(義兵)에 빌려 오로지 약탈을 일삼던 자들이다. 김도현(金道鉉)은 39년 1월 영양(英陽)에서 폭도 약 1백을 모아 봉기하였으나 며칠 후에 대구 진위대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4월 하순부터 신돌석(申乭石)은 영해(寧海)에서, 이하현(李夏鉉)은 진실(眞實)에서, 정용기 (鄭鏞基)는 영덕(盈德)에서 봉기하여 그 수 2백 내지 6백 명으로 5월 상순부터 6월에 이르 는 동안 임현내면(臨縣內面) 안동 동방 약 10리 반 청송(靑松)·의성(義城)·이전평(梨田坪 ; 청송의 동남 약 40리)·영덕(盈德)·영해(寧海)·영양(英陽) 및 강원도 평해(平海)·울진(尉珍)·삼 척(三陟) 등 각지에 걸쳐 출몰 횡행하여 금전·총기 등을 약탈하였다. 한국정부는 6월 상순 토벌을 위해 대구진위대 정위(正蔚) 박두영(朴斗榮)이 지휘하는 2백 의 한병(韓兵)을 영덕 방면에서, 또 원주진위대에서 참령(叅領) 이승칠(李承七)이 지휘하는 1백 명을 남진시켜 서로 협력하여 평해(平海) 부근에 적과 충돌하였으나, 그저 구축해 버렸 을 뿐 그 수괴를 놓쳐 버렸으므로 일시적 소강(小康)을 유지하였을 따름이었다. 제3편 명치 40년(1907년;편자 주) 한황(韓皇)의 양위(讓位) 및 군대 해산 제1장 밀사사건 폭로로 한황의 양위에 따른 경성 시가의 동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