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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 이때 날은 아직 새지 않아 수색이 곤란하였으므로, 우선 적의 퇴로를 막기 위해 제4중대는 주로 동문에서 남문을 거쳐 서문에 이르는 성벽을, 제2중대는 주로 서문에서 북문을 거처 동문에 이르는 성벽을 점령하고, 헌병 및 경찰관의 일부는 동문과 북문을 감시하였다. 동이 틀 무렵부터 옥내 수색을 개시하여 사력을 다해서 저항하는 자는 사살하고 그렇지 않 은 자는 포획하여 오전 7시 30분 성내외의 수색을 끝냈다. 이 전투에서 우리 편에서는 한국 순검 1명이 전사하고 보병 1명이 부상하였다. 폭도는 시 체 82, 포로 1백45명으로 수괴 민종식(閔宗植) 이하 약간을 도망쳐 나가게 한 것은 유감이 었다. 지대장은 헌병 및 경찰관으로 하여금 성내의 질서 회복을 담당시키고, 포로는 취조 결과 70여 명을 석방하고 80여 명을 경성(京城)으로 압송하고, 지대는 경성으로 귀환하여 편대를 풀었다. 민종식(閔宗植)은 그 이후 오랫동안 종적을 감추었으나 우리 헌병과 경찰관의 주도면밀한 수색으로 11월 20일 공주군(公州郡) 탑산리(塔山里)에서 포박되어 40년 7월 평리원(平理院) 에서 사형에 처하여졌으나, 그 당시의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의 청으로 1등을 감하여 종 신 유형에 처하여져 진도(珍島)에서 형의 집행을 받다가 다음 12월 특사로 석방됐다. 민종식(閔宗植)이 거사를 하자 궁중(宮中)에서도 다액의 군자금을 대어 준 듯했고, 또 그 일당에는 윤석봉(尹錫鳳)·황영수(黃英秀)·정재호(鄭在鎬)·곽한일(郭漢一)·이용규(李容珪)·김덕 진(金德鎭)·박윤식(朴潤植)·신현두(申鉉斗)·김상덕(金相悳)·남운식(南雲植)·이전영(李傳榮) 등 지명의 인사들도 가입되어 있었다. 제2장 전라도에서 일어난 폭도 토벌 폭도의 수괴 최익현(崔益鉉)은 일찍이 참정(叅政 : 내각 총리대신 상당) 또는 경기도관찰사 (京畿道觀察使) 등 관력이 있어 유생(儒生)들 사이에서는 크게 명망이 있는 노유(老儒)로서 수천의 문제자들이 있었다. 명치 38년(1905년;편자 주) 일한차관계약(日韓借款契約)이 체결되자 크게 반대론을 제창하 고 또 배일(排日)에 관한 상소를 하며, 경성(京域)에 유약소(儒約所)를 설치하고 통문(通文) 을 13도에 발송, 크게 유생들을 선동하였으므로 치안 방해라는 죄명으로 경성 이외로 추방 된 열렬한 배일주의자다. 최익현(崔益鉉)은 39년(1906년;편자 주) 5월 전 낙안(樂安 ; 목하 순천군에 병합되다. 순천 서방 약 30리 반) 군수였던 정삼품 신보균(正三品林炳瓚) 상모(相謀)하여 민종식(閔宗植)과 동일한 목적하에 서로 기맥을 통하고 있었다. 그는 도당 백 수십 인을 규합, 6월 초순 전라 북도 태인군(泰仁郡)에서 군사를 일으켜 동월 8일 동도 순창(淳昌) 및 전라남도 담양(潭陽) 을 점령하자 이에 응하는 자 그 수 약 4백50에 달하여, 전라남도 동북 곡성 지방을 횡행하 여 관아를 습격하고 세금을 약탈하며 총기를 빼앗고 관헌의 구치자를 석방하는 등 횡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