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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의 기안(起案) 등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헌병이 그것을 탐지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13일 야반에 동지 3백40명을 이끌고 청양(靑陽)을 거처 홍주(洪州)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우리 헌병이 그곳에 다수 주둔하고 있다는 유언에 겁을 먹고 발길을 돌려 보령(保寧)으로 향하던 도중 17일 미명 합천(合川 ; 청양 서방 약 20리)에서 우리 헌병의 습격을 받아 도 당 다수는 포박을 당하고 민은 겨우 몸을 피하여 도망쳤다. 그는 재차 보령군(保寧郡) 청 라면(靑羅面 ; 보령 동남 약 10리 반) 부근을 근거지로 은밀히 여러 곳을 배회하여 인민을 선동하고, 또는 원 관리였던 자를 권유 가맹시켜 5월 14일 남포군(藍浦郡)에서 봉기, 동 군수 및 보령 군수에게 병기(兵器)·인마(人馬)·금품을 강청하고, 혹은 일본인을 포박하는 등 횡포를 극하게 되었다. 그 후 그 세력은 점차 증대하여 그 수 약 2백50에 달하였고, 19일 오후 5시 대거 홍주성을 습격하였다. 그 곳 주재 헌병 2명 및 우편국원 등은 남문 성벽에 의거, 성내에 있던 구식 한국 화포를 이용하여 항전하였으나, 폭도 역시 구식 화포 2문과 신식 소총으로 공격하여 왔다. 그래서 점차 우리 탄약은 결핍되어 방어 곤란에 빠 져 드디어 거류민 전원을 보호하고 북문에서 덕산(德山)으로 퇴각하였다. 폭도는 성내외의 민가 관아에서 병기·양식·탄약 등을 징발하고 스스로 창의군(倡義軍)이라 칭하고 전원 약 5백을 동서남복의 각 진군(鎭軍) 및 시위대로 구분하여 홍주성(洪州城)에 의거하였다. 경찰관과 헌병대는 수차 다음 표와 같이 인원을 파견하여 폭도 진압에 힘썼으 나 주효하지 못하고 겨우 홍주성의 일부를 포위하는데 그치고 결국 군대의 출동을 보게 되었다. 헌병과 경찰관의 진압이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주둔군 사령관은 한국 정부에 대하여 누 차 소요 병력을 파견하여 속히 진정시킬 것을 재촉했으나, 그도 여의치 않아 이등(伊藤) 통감은 한민(韓民)에 대한 일본의 위신을 보이기 위해 주둔군 사령관에게 출병(出兵)을 명 하였다. [경찰관 및 헌병대의 파견] 진압을 위해 파견된 관서(官署) 파견 인원누계 진압에 착수한 월일 적 요 공주경무고문지부 (公州警務顧問支部) 경부 이하 6명65월 20일실패 수원헌병분대(水原憲兵分隊) 조장(曺長) 이 하 6명 125월 21일실패, 예산(禮山)으로 퇴각 경성경무고문부 (京城警務顧問部) 동원(桐原) 경 시(警視) 및 한국 경무관 부하 20 3422일증원 수원헌병분대(水原憲兵分隊) 분대장 이하 14명 4824일 정오(正午)부터 공격, 격전 4일간 에 미쳤으나 실패 경성헌병대 일지(日枝)헌 병대위 이하 13128일 정찰목적으로 토방(土方) 경부 이 하 7명을 홍주 서문 방면으로 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