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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 또는 군대에 대해 교전을 감행해 오는 수가 없지 않아 있지만, 그것은 우리 병수(兵數)가 가장 근소한 틈을 타는 경우에 한했었다. 그러므로 이것의 토벌 행동은 분명(奔命)에 지쳐 버리는 수가 많고, 일거 섬멸하는 효과를 거둘 수 없어 마침내 그 섬멸 시기를 길게 끌게 되고 말았다. 대저 명치 40년(1907년;편자 주) 7월, 사건이 발생되었을 때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 은 겨우 1개 사단뿐으로서 경성(京城) 부근의 수비는 자연 불완전하였으므로 급거 평양 및 북관(北關) 방면에서 군대를 초치(招致)하는 등 임기응변의 수단을 취해 완전 배치에 힘을 썼다. 그 후 동월 말에는 보병 제12여단이 도착하고 동 10월에는 기병 1연대의 증파가 있었고, 다음 해인 41년(1908년;편자 주) 5월에는 보병 2연대가 도한(渡韓)하여, 병력이 점차 증가 됨에 따라 토벌 행동이 더욱 용이하게 되어 진압 효과도 또한 점차 현저하게 나타나게 되 었다. [폭도 진압 경과의 개요 일람표] 연월별 폭도가 점거한 주요 지방 주요한 폭도 괴수 및 폭도의 개수 토벌대를 파견한 주요 부대토벌 결과의 개요 39년 (1906년) 5월 충청남도 홍주성 (洪州城) 민종식(閔宗植) 이하 약 500명 보병 제 60연대 대대장 전중소좌 (田中少佐)가 지휘하는 보병 2중 대, 기관총 2, 기병 반 소대, 헌 병, 경찰관 및 한국 군대 약간 약 반수의 손상을 주고 수 괴를 놓쳤으나 며칠 안 가 서 헌병에게 잡혔다. 6월 전라북도 순창(淳昌)부 근 최익현(崔益鉉) 이하 약 450명 남원(南原) 및 전주(全州)의 한국 진위대 수괴 이하 전원 투항 경상북도 평해(平海)부 근 신돌석(申乭石) 이하 약 1천 명 대구(大邱) 및 원주(原州)의 한국 진위대 약 300명 그저 구축했을 뿐 40년 (1907년) 7월 경성(京城) 시가의 동요 (한황 양위에 즈음해서) 폭민(暴民) 및 탈주병 약간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야포병 중 대 기타 경찰관 전원을 출동시켜 시가를 경호하다 경찰관 및 양민에 약간의 피해가 있었으나 포화를 열 지 않고 일시 진정되었다. 경성시(京城市) 시위보병 제1·제2 연대의 각 제1대대 군대 해산에 있어 반란 보병 제51연대 판부소좌(坂部少 佐)가 인솔하는 보병 3중대, 기관 총 2, 공병 약간 약 800명에게 손상을 주었 다. 기타는 사방으로 도망 쳐 후일 폭도에 투신 8월 강원도 원주(原州) 원주진위대 군대 해산 반란 충주(忠州) 수비 대장 이궁소위 (二宮少尉) 이하 19명 거류민 및 경찰관을 수용해 서 충주로 귀환 경기도 강화도(江華島) 강화도분견대 폭민 도합 약 800명 보병 제14연대 대기소위(大崎少 尉) 이하 보병 1소대, 기관총 2 그저 구축해 버렸을 뿐 강원도 원주(原州) 부근 민긍호(閔肯鎬) 이하 약 1000명 보병 제47연대. 하림소좌(下林少 佐)가 인솔하는 보병 2중대, 기관 총 4, 공병 1소대 각처에서 약간의 폭도를 죽 였으나 폭도의 출몰이 교묘 해서 토벌 효과는 현저하지 못했다. 상기 토벌대중 불 충청북도충주 (忠州) 부근 우동(右同) 보병 제51연대 족달중 좌(足達中佐)가 인솔하는 보병 3 중대, 기관총 4, 기병·공병 각 1 파 소좌(不破)가 인솔하는 부대는 임무종료 후 그 수 비지 대전(大田)으로 귀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