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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 그러나 후일 헌병 보조원 제도를 실시하게 되자 해산병을 위해 생계상의 광명을 주게 되 어 감연히 이에 응하는 자가 적지 않았고, 일단 폭도에 투신했던 자도 또한 꼬리를 물고 그것을 희망하는 자 많게 되었다. 원래 그들 잡배(雜輩)들을 깊이 신용할 수는 없었으나, 이들을 토벌대로 이용하는 통역으로 삼아 관민의 의사소통을 꾀하고 밀정으로 삼아 폭도 소재지를 검찰시키는 등 직접 간접으로 토벌상에 효과를 가져온 점이 적지 않았다. 폭도의 기인(起因)은 대략 전술한 바와 같으며, 이것을 약언(約言)하면 다음과 같다. ① 한국 군대의 해산에 즈음하여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고, 또는 단체 해산 후 은사 금을 소비해서 의식에 궁한 장교 하사졸을 주뇌(主腦)로 해서 그에 부화뇌동하여 그 배하 로 모인 자. ② 지방에서 명망이 높은 유생 또는 양반으로서 완고하고 시세의 추이를 모르며, 새로운 시정 방침을 좋아하지 않아 도당을 모아서 궐기한 자. ③ 정치적 야심을 품고 만일을 요행 삼아 다른 소요에 편승한 자. ④ 종래 화적이라 칭하고 각지를 횡행하며 약탈을 일삼던 자로서 시세를 이용해서 의병 이라 자칭한 자. 이 밖에 함경남도(咸鏡南道) 갑산군(甲山郡) 부근에서 일진회원(一進會員)의 전횡을 규탄 하고 서로 결속해서 폭발한 일파가 있었으나, 곧 위의 4항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고 말 았다. 그 후 다시 결의를 하고 자진 폭도가 되는 자가 비교적 적지 않았으나, 소요의 선동 함에 있어 야소교 신도가 유력했던 점, 그리고 아직도 배후에는 그들의 불평과 사대사상을 이용해서 감언으로써 그를 조종하여 자기의 세력을 확장해서 그 이익을 꾀하는 선교사가 존재했던 것은 실로 덮어 버릴 수 없는 사실이었다. 폭도 유별은 상기와 같이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진정한 목적에 있어서는 명 (名)과 이(利),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얻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부하들은 똑같이 무지몽매한 무리들로서 오직 의식을 얻기 위해 뇌동한 자, 또는 강박에 견디지 못 해 일시 이에 가담한 자에 지나지 않아, 그들의 안중에는 처음부터 군국(君國)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 스스로 의병이라 칭하고 충군애국을 표방하고 국권 회복이란 미명 아래 각처를 횡행했는데, 그 다소 강대한 것도 겨우 1~2회의 충돌로 다소의 손해를 받으면 곧 그 전의(戰意)를 잃고 오로지 우리 예봉을 피하는 데 급급했다. 따라서 그 집산 (集散)이 일정치 않아 시리(時利)가 없으면 곧 양민으로 분장해서 그 종적을 감추었다가 다시 일어나 적(賊)이 되는 등은, 일면 우리 토벌대의 정예에 대항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으나, 한편 의군(義軍)이란 이름 밑에서 그 사리(私利)를 취하 는 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간파(看破)할 수가 있다. 요컨대 비단(匪團)의 행동은 언제나 토벌 부대의 이목을 피해 각지로 횡행해서 놀랄 만한 신속과 정확성을 가지고 우리 행동을 찰지(察知)하고, 토민의 원조와 지리적 편의에 의해 수시수처(隨時隨處)에 출몰해서 그 폭행을 함부로 하고, 도처에서 금전 미곡을 강제 징발 해서 오직 그 사복만을 채우려고 힘쓰는 데 지나지 않았다. 간혹 우리 수비대를 습격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