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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권모술수를 성공의 비결로 오신하고 있는 한황(韓皇)은 시종 재외(在外) 망명자와 기맥을 통해 제종 음모를 강구, 일한 관계를 파괴하려는 생각에서 이미 그 외교의 일체를 통틀어 제국에 위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치 40년(1907년;편자 주) 7월 상순 비밀리에 그 사신을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해아(海牙)로 파견, 열국에 애소하여 일본의 굴레를 벗으려다가 폭 로되었다. 그러자 우리 외무대신을 한국에 파견시켜 한황의 양위(讓位), 내각의 교질(交迭) 이 단행되자 물정(物情)이 소란해지고 유언(流言)이 백출하고, 혹은 이로써 일본이 강압적 수단을 쓰는 것이라 보고 정치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자들이 앞장서서 민심을 선동하여, 그 상황은 시시각각으로 불온도(不穩度)가 높아져, 7월 19일에는 경성부(京城府) 종로(鍾 路)와 대한문전에서 불상사를 야기시켜 경성 시가 거리에 유혈의 참극을 연출하기에 이르 렀으나, 경비의 만전으로 동월 23일로써 거의 평정 상태로 회복되었다. 동월 24일 일한신 협약(日韓新協約)은 무사히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8월 1일 한국 군대의 해산이 실시되자, 때마침 시위보병(侍衛步兵) 제1연대(第一聯隊) 제1대대(第一大隊)와 그에 인접하 고 있는 동(同) 제2연대(第二聯隊) 제1대대(第一大隊)는 해산 식장에 이르기 전에 제1연대 제1대 대장의 자살을 유발(誘發), 각기 병영에서 폭발되어 교관인 일본 장교 등에게 박해 를 가하려고 찾아다니다가 병영(兵營)을 접수차 출장한 아군대에 대해 반항했으나 잠시 후 그것을 진정시켰다. 이 충돌에서 그는 다대한 사상과 포로를 냈으나 일부는 도주해서 각지로 분산했고, 폭발 의 진상은 각지에 오전(誤傅)되어 드디어 그 후 수년에 걸쳐 소란의 동기가 되었다. 그 밀 사 사건이 폭로된 후 한황의 양위 신협약의 체결에 즈음해서도 아직 현저한 동란은 없었 고, 겨우 7월 22일 경기도(京畿道) 안성군(安城郡)에서 봉기한 약 3백 명의 비도(匪徒)가 있었으나, 우리 경찰관의 힘에 의해 곧 진압된 외에는 감히 무기를 동원하는 따위의 큰 소 요는 없었다. 그러나 8월 1일 경성에서 있었던 소충돌 이래 불온한 공기는 갑자기 증가, 각지에 만연해서 8월 6일에는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 진위대(鎭衛隊)의 폭동이 되고, 동월 10일에는 경기도(京畿道) 강화도(江華島) 분견대(分遣隊)의 반항이 되고, 기타 경기· 강원·충청·황해·경상·전라 등 각지에서 꼬리를 물고 폭도의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 밖 의 군대에 있어서는 경비가 적절했으므로 다행히 무사히 해산을 끝내기는 했다. 그러나 원 래 한국의 병영은 부랑 무뢰한들의 수용소 같은 느낌이 있었으므로, 군대의 해산으로 말미 암아 이들 병정은 거리로 쫓겨 나오게 되자, 위험사상(危險思想)을 지방에 전파시키게 되 였다. 뿐만 아니라 항산(恒産)도 없고 또 항심(恒心)도 없는 그들의 대개는 정업에 종사하 는 자가 적어 군대 해산할 당시 관급(官給)한 다소의 은사금(恩賜金)은 곧 주식(酒食)에다 소모해 버리고, 드디어는 갈 곳이 없어 비도(匪徒)의 무리로 투신하게 되는 기운을 조장하 게 되어, 각 지방의 동란을 더욱 더 확대시키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 병사를 많이 포섭한 비도는 일반 폭도에 비해 적어도 대오를 짜 가지고 전투하는 방법과 사격술을 알고 있으므로 그 저항력이 비교적 완강한 것은 물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