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page

341 평지에 풍파를 일으켜 그 틈을 타서 출세해 보려는 자까지 나타났다. 그리고 이 양자는 사 민중의 상위에 있었으므로, 오만하기 짝이 없고 유타를 일삼아 농공상은 노예시·학대하여 양민에게 고통을 준 점에서는 같았다. 그러므로 일반 창생은 끊임없이 동서남북에서 압박을 받아 오늘의 부자(富者)가 반드시 내일의 유복을 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흉악이 처벌되지 않고 충절이 칭찬받지를 못했 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는 독립 진취의 기상은 멸각(滅却)되고 상하 똑같이 소위 취생몽사 의 기풍에 젖어, 그것이 적년의 폐정 습관이 되어 식산흥업(殖産興業)의 길이 여기서 두절 되고, 문물(文物)이 날이 지남에 따라 퇴폐되어 더욱 더 쇠망의 근원을 깊게 했다. 즉, 전 일에 있어서 구한국의 상하는 겨우 하급 인민과 일부 청백한 인사를 제외하고는 그 심정 과 결과에 있어서는 거의 적도(賊徒)에 유(類)하지 않는 자 없고, 전토(全土)를 그들에게 유린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전국 도처에 이미 분규 소란이 터지지 않은 곳 이 없다. 그러나 그 소리가 비교적 크지 않았던 까닭은 오직 구린 자가 자신은 그 구린내 를 모르는 데 기인했을 뿐이다. 2. 일본 세력 부식 후의 동요 폐정의 인습이 전술한 바와 같아 명치 27~28년(1894~1895년;편자 주) 전쟁의 동기가 된 동학당(東學黨) 일파의 소란으로 번지고, 이어 명치 38년(1905년;편자 주) 11월에 체결된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에 의해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거두어 한국을 보호국으로 하고, 그 주권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이래로 궁중을 근원으로 한 배일 수단에 관한 각종 음모는 재야원로(在野元老) 혹은 양반 유생들의 선동에 의해 부단히 치열하게 강구되 어 각지에서 소요를 일으키는 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삼남 지방은 고래로부터 유생과 양반의 독점적 무대였었던 관계로, 이 지방에서 경기도 방면에 걸쳐 배일사상의 전 파가 가장 빠르고, 그리고 가장 깊었었다. 즉, 명치 39년(1906년;편자 주) 5월 일본의 굴 레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것을 명분 삼아 암암리에 각국 사신의 동정을 구해 비도(匪徒) 2백 여 명으로 충청남도 홍주성(洪州城)에 웅거, 스스로 의군(義軍)이라 칭하고, 반기를 든 양 반 민종식(閔宗植)은 비교적 완강해서 토벌하러 갔던 우리 헌병과 경찰관도 조속히 그를 진정(鎭定)시킬 수 없었고, 한국 군대 역시 그것을 담당하려 들지 않았으므로, 부득이 우리 수비병 약 반대대(半大隊)와 기병 약간을 파견해서 그를 진압시켰다. 그보다 앞서 홍주의 비도들과 호응해서 경상북도 안동 부근에서 일어난 유생 70~80명이 가담하고 있는 폭도와, 전라북도 순창 부근에서 소란을 기도한 노유(老儒) 최익현은 함께 홍주 평정 후 한국 군대에 의해 진정되었다. 그 후 서정의 개혁이 착실히 진척되고, 재무의 쇄신, 경무기관의 확장 등 제반 시설이 더 욱 더 면목을 새롭게 함에 따라, 지방의 우민(愚民)들은 자칫하면 그 취지를 오해하게 되 었다. 설상가상 이들 신정의 진척과 이해가 상반되는 관속들은 은근히 그들을 선동했으므 로 각지에서 시시로 작은 소요가 발생했으나, 그것은 전부 하나의 우발 사건으로 끝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