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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기사제목 童子亦慈善 발행일 1908-04-16 (大韓隆熙二年 四月 十六日) (木曜(목요)) 생산정보 海朝新聞 第四十三號 전설을 들은즉 양근 군에서 의병과 일본병이 소요를 지낸 후에 소화된 집을 다시 건축하 기 위하여 유지 제씨가 발기하여 기성사(期成社)를 설립하고 취지를 광포하매, 각 자선가 에서 다수한 보조를 하는데 그 고을 남중면 사는 十一 세 아이 이수동(李守同)이가 그 모 친에게 고하기를 이러한 때를 당하여 동포된 의무에 불가불 보조를 아니 할 수 없으니 우 리 산에 기른 삼림 중 쓸 만한 재목을 다 보조하자 하매 그 모씨 왈, 우리 산림은 다 치 송뿐이라. 쓸 만한 것이 없으니 어찌 할고 한데, 이 동이 다시 말하기를 재목이 비록 쓸 것 없으나 보조는 없지 못할 터이라 하여 간청하기를 누차 함으로 다수한 연목을 사서 보 조하였다더라. 〇 「대한매일신보 1908년 4월 23일」 지난 16일 홍천국 북쪽 약 1리에서 의괴(義魁) 이병수(李秉壽)가 이끄는 100여 명의 의병 (義兵)과 지평(砥平)군의 일본수비대(日本守備隊)와 교전하였다. 〇 「황성신문 1908년 4월 29일」 본월 10일 양근군 북면에 나타난 의괴(義魁) 김춘수(金春洙)등 십여 명 중에서 해군에 귀 화자 6명을 체포하였는데 2명은 죽었고 4명은 도타귀가(逃躱歸家)하였다 하다. 〇 「고종시대사 1908년 5월 19일」 기사제목:法部大臣의 上奏에 의하여 平理院에서 연월일:隆熙 2年, 戊申(1908년, 淸 穆宗 同治 2年, 日本 孝明 文久 3年) 5月 19日(火) 隆熙 2年 5月 19日(火) 法部大臣의 上奏에 의하여 平理院에서 審理한 廣州·龍仁·楊根·楊 州·利川 等地의 義兵將 金鳳基를 該院의 判決대로 絞首刑에 처하게 하다. 출전:日省錄 隆熙 2年 5月 19日 承政院日記 隆熙 2年 5月 19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