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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출전:보훈처 독립운동사(제1권) p. 723 〇 「고종시대사 1908년 2월 9일」 기사제목:金若有의 義兵이 砥平에서 연월일:隆熙 2年, 戊申(1908년, 淸 德宗 光緖 20年, 日本 明治 27年) 2月 9日(日) 隆熙 2年 2月 9日(日) 金若有(연구논문에 없는 의병임;편자 주)의 義兵이 砥平에서 日本 軍과 交戰하다. 출전:梅泉野錄 隆熙 2年 1月 〇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14일」 본월 5일에 지평(砥平)군 여물리장(余勿里長) 이건영(李健永)의 보고를 따르면, 관동대장 이라 칭하는 김경유(金景有)가 의병 70명을 이끌고 북면장 이종덕(李鍾德) 상북면 고유리 장을 잡아갔는데 그 곳 수비대장 이하 34명이 6일에 토벌차로 떠났다 하다. 〇 「황성신문 1908년 3월 10일」 지평(砥平)군 의병장 이연년(李延秊)이 병졸 400여 명을 이끌고 부조 열읍에 횡행한다더 니 시세의 오해를 각오하고 소속 병졸을 효유 귀화케 하고 이연년도 귀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병이 탐지하고 즉시 착거했다고 한다. 〇 「해조신문 1908년 3월 14일」 기사제목 의병소식(義兵消息) 발행일 1908-03-14 (大韓隆熙二年 三月 十四日) (土曜(토요)) 생산정보 해조신문 第十五號 근일 각처 의병의 소식을 들은즉 이강년, 민긍호 제씨의 영솔한 군병이 도합 사,오만 명 인데 경기, 충청, 경상, 강원, 황해 다섯 도로 근거를 삼고 일제히 맹세하고 서울을 습격하 려하여 세 길로 나눠 들어가는데 한 길은 포천, 연천으로 양주를 향하고 한 길은 여주, 이 천, 양근으로 광주를 향하고 한 길은 양주, 적성으로부터 장단, 파주, 고양으로 향하여 일 제히 경성을 치자 하는지라. 일병이 삼로로 의병이 들어옴을 알고 동대문, 동소문, 광해문, 창의문 각 문에 대포를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