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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〇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6일」 지평(砥平)군수 민달식(閔達植)이 내부에 사직을 청원하였다고 하다. 〇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7일」 양근(楊根)군 일진회원이 본부에 보고 의병(義兵)이 더욱더 창궐(猖獗)하여 민충정공가(閔 忠正公家) 전장(田庄)은 절대 범하지 않은 채 모두 추수상송(秋收上送) 하면서도 기타 경 답소수(京畓所收)는 모두 집유(執留)하며 일진회원을 위협하고 있으니 본부에서 보호해 주 기 바란다 하다. 지평(砥平)군수 민달식(閔達植)이 부임하지도 않고 사면(辭免)했다는데, 민씨는 의병이 두 려워서 그런 것인지, 군수를 잠시 빌리는 것으로 아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다. 〇 「고종시대사 1907년 11월 7일 기사제목:李麟榮·方觀一·鄭大一 등의 義兵 約 700名이 연월일:隆熙 元年, 丁未(1907년, 淸 德宗 光緖 20年, 日本 明治 27年) 11月 7日(木) 光武 11年 11月 7日(木) 李麟榮·方觀一·鄭大一 등의 義兵 約 700名이 砥平에서 日本軍 을 攻擊한 후 退却하다. 출전:朝鮮獨立運動 Ⅰ 民族主義運動篇 第1編 義兵運動 附1 朝鮮暴徒討伐誌 第4編 第4 章 其1 〇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8일」 평리원(平理院)에서 법부(法部)에 질품(質稟) : 피고 김성완(金聖完)은 광주군에서 부모와 살다가 음력 7월 23일경 이현(梨峴)에서 우연히 이춘응(李春應), 방덕영(方德榮)과 만나 양 근(楊根)군 수리에 도착하여 의병장(義兵將) 권득수(權得洙)와 함께 춘천⦁홍천⦁화천 등지 를 다니면서 각지의 민가에서 주식(酒食)을 토끽(土喫)하고, 급료로 모은 돈으로 나귀 1필 을 사서 8월 24일 의병 령수 김창석(金昌錫)에게 애걸하여 풀려나 서울로 돌아온 사실이 인정되므로 내란죄를 적용하여 류(流) 7년에 처함이 마땅하다. 〇 「고종시대사 1907년 11월 12일」 기사제목:法部大臣의 上奏에 의하여 연월일:隆熙 元年, 丁未(1907년, 淸 德宗 光緖 20年, 日本 明治 27年) 11月 12日(火) 法部大臣의 上奏에 의하여 平理院에서 審理한 楊根義兵將 曹仁煥麾下義兵 劉相德과 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