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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집을 모두 태워버렸다고 하다. 〇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13일」 양근(楊根)군 잠자리 40여 호가 모두 일진회원인데 창의소대장(創義小隊長) 김(金)모가 혼 자 이곳에 들어와 이들을 모아 놓고 이후로 일진회를 배척할 것이며, 혹 그렇지 않더라도 행위를 단정히 하면 방화살육은 면할 것이라고 효유(曉諭)하였다고 하다. 〇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15일」 7일 양근(楊根)군 유목(楡木)동 부근에서 의병(義兵) 70명이 일대(日隊)와 교전하다. 의병 (義兵)은 북쪽으로 물어가고, 일대(日隊)는 부근 산정(山頂)을 점령한 후 다시 이날 밤에는 인제(隣蹄)를 점령하였다 하다. 〇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25일」 음력 11일 오후 양주⦁양근 등에 있던 의병(義兵) 수천명이 광주⦁수어평(守禦坪)에 몰래 이르러 일본인 가옥에 불을 질렀다고 하다. 〇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3일」 20일 죽산군에서 의병 200여 명이 일본 군대와 교전한다고 하다. 현재 의병(義兵)은 지평군 부근을 중심으로 모이는 듯하다. 양근군아(楊根郡衙)에 의병(義 兵)이 매일 수십 명씩 모여 한강에서 배를 약탈하므로 선로(船路)가 끊겨 화물취수 등이 어렵게 되자 수비대를 양근(楊根)에 배치하여 이를 보호한다고 하다. 27일 오전 6시 양근(楊根)군 부근 사즉사(舍卽寺)〔사나사(舍那寺)의 오기로 보임;편자 주〕 에 모여 있는 의병을 공격하기 위해 일병이 사즉사(사나사의 오기로 보임;편자 주) 동남 고지를 점령할 때 의병(義兵)이 이곳으로 물러나와 대부분은 편전(片田) 쪽으로 가고, 일병 일부는 고읍(古邑)지방 고지에서 교전하다. 의병(義兵)이 전 지평(砥平)군수 이한용(李漢用) 을 데려다가 사무를 맡기려 하자 이씨는 도망가고, 가족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하다. 〇 「고종시대사 1907년 11월 5일」 제목:의병 약 30명, 경기도 砥平 서방 芝德里에서 교전. 연월일:1907년 11월 05일 의병 약 30명, 경기도 砥平 서방 芝德里에서 교전. 출전:보훈처 독립운동사 (제 1권) p. 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