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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 양평(楊平)군수는 의병(義兵)을 피해 달아났고, 여주군에 주재하던 일본순사와 가족이 피 찰되었고, 여주우편소 금고가 파괴되었고, 양평(楊平) 우편취급소장과 이곳 주재 일본순사 와 기타 경부(警部) 일행 중 순사 6명과 가족 5명, 순검 4명은 관(官)에서 보관 중이던 장 부 등을 빼앗아 가족들과 함께 14일에 여주 방면에서 배를 타고 경성으로 돌아왔는데, 이 곳의 순사분파소는 모두 부서지고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한다. 〇 「고종시대사 1907년 8월 19일」 기사제목: 義兵이 砥平郡守 金泰植을 연월일:1907년(丁未, 1907, 淸 德宗 光緖 33年, 日本 明治 40年) 8月 19日(月) 義兵이 砥平郡守 金泰植을 銃殺하다. [출전] 官報 隆熙 元年 9月 4日 梅泉野錄 隆熙 元年 7月 續陰晴史 下 隆熙 元年 8月 22日 〇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0일」 양근(楊根)군 세무주사 황우정(黃祐貞)이 의병(義兵)에게 지화(紙貨) 100원과 문부(文簿)를 빼앗기고 구타당한 후 어제 경성으로 피신하여 현재 치료중이라고 한다. 〇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2일」 처처의병(處處義兵) 15일 양근(楊根)군에서 의병(義兵) 100여 명이 분파소와 우편취급소 를 습격한 후 북쪽 10리 되는 용문산에 들어가 격문(檄文)을 뿌리고 도당(徒黨)을 모으고 있음, 이천군에서는 전주(電柱) 수십 본을 단절하자 21일 일병(日兵) 1중대를 급파하다. 양 근(楊根)군수 정원모(鄭元摸)가 내부로 보고해 이 곳 포군 등이 작요(作擾)를 일으키고 있 다 하다. 〇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3일」 양근(楊根)군에 의병(義兵)이 크게 일어나 서울에서 70리 되는 한강상류 고랑진(高浪津)에 서 배를 모두 부수고 행인의 왕래를 일체 금지하여 이 곳의 통로가 끊어졌다고 한다. 이 무렵 지평군수 김태식(金泰植)이 의병(義兵)에게 피해(被害)되었다는 말이 있다 하다. 〇 「고종시대사 1907년 8월 24일」 기사제목:日本軍이 楊根의 龍門등 義兵根據地를 襲擊하여 연월일:隆熙 元年, 丁未(1907년, 淸 穆宗 同治 2年, 日本 孝明 文久 3年) 8月 24日(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