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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해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註15) [註 1] 유한철, 「김하락의진의 의병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3쪽. 김하락(1846~1896)은 경북 의성 출신으로, 자는 季三, 호는 海雲堂, 본관은 의성이다. 조 상학은 김하락의 이종제로 경북 풍기 출신이다. 구연영은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자는 春 景, 본관은 능성이다. 그의 부친은 具哲祖로 류인석의 제천의병에서 활동하였다. 김태원 (1863~1933)은 서울 출신으로, 자는 春伯, 호는 集義堂, 본관은 해풍이다. 문집으로 『집의 당유고』가 있으며 류인석의 문인이다.☞ [註 2] 김하락,『진중일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 1971, 586쪽).☞ [註 3] 김하락,『진중일기』참조.☞ [註 4] 김하락,『진중일기』 585~586쪽.☞ [註 5] 김하락,『진중일기』 591쪽.☞ [註 6] 『동경조일신문』1896년 3월 18일자.☞ [註 7] 『동경조일신문』1896년 3월 17일자.☞ [註 8] 김하락,『진중일기』 615쪽.☞ [註 9] 「延安南大池水稅節目」(辛卯 光緖 17年正月 成冊). 이승룡(1853~1896, 자 秀雲, 호 錦坡, 본관 靑海)은 靑海伯 襄烈公 李之蘭의 15대 손이 다. 경기도 양근군 동종면 대곡리(현 양평읍 대흥리)에서 부친 五衛將 殷錫과 경주최씨 사 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10세에 사서삼경을 통독하고 13세에 안동 김씨와 혼인하였다. 14세 때인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벽에다 ‘의병장이승룡’이라 써놓고 상경했다고 전한다. 25세 되던 1877년 무과에 급제하여 부호군의 직에 올랐으며, 1882년 임오군란 시 민겸호가 살해되자 시신을 수습하여 그 아들인 민영환 집으로 호송하 였다. 이 일로 민영환과 교분이 두터워졌다. 1890년에 통정대부에 올라 강령현감과 해주 진관 병마절제도위에 임명되었다. 그는 그 해 2월에 강령현감으로 부임하여 延安지역의 南大池 아래에서 경작하는 주민들이 관개 문제로 민요가 일어남에 이를 해결하고 節目을 정해 수습하였다. 이승룡 관련 자료는 이 외에도 강령현감으로 재직시 기록한 「光緖 17年 8月 日 本縣重記成 冊」과 「康翎縣監李承龍日記」 (1891년 5월 9일~1891년 5월 14일)를 증손 李重臣이 소장하고 있다.☞ [註 10] 李延秊, 「康翎公諱承龍家狀」 (필사본).☞ [註 11] 유한철, 「김하락의진의 의병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3, 17~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