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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 김윤식은 그의 『속음청사』에서 “양근과 광주의 비도들이 남한으로 모여들어 백성들의 전 곡을 거두어들이며 굳게 지킬 계획을 하여 경영병京營兵이 이들을 공격하였으나 패퇴하고 대포 1문을 잃었다. 적세는 더욱 떨쳤다 한다.” 註12)라고 하여 의병을 ‘비도’로 보는 관 리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남한산성에 양근의 병사들이 주력부대의 하나로 편성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양근의병은 바로 이승룡이 모집하여 이끌고 간 부대로 보인다. 즉, 『동경조일신문』 1896 년 4월 1일자, 3월 18일 경성 발에 의하면, 남한산성의 적수賊數는 약 1천6백 명으로 그 중에 1천 명은 광주·이천·양근 등의 포군 , 즉 구지방병이고 그 나머지 6백 명은 광주의 농민이다. 적의 수괴는 광주의병장 심영택沈 營澤, 이천의병장 박주영朴周英, 양근의병장 이석용李錫容의 3인이다. 註13) 라고 하여 남한산성의 의병 중에 광주의병과 이천의병·양근의병이 1천여 명에 달하며, 양 근의병장으로 ‘이석용’을 거론하는데 이석용이 바로 ‘이승룡’으로 보인다. 당시 양근의 의 병장으로 남한산성에 입성한 이로는 이승룡 외의 인물이 아직 확인이 안 된다. 동경조일신 문사 기자 서하통철西河通徹이 이승룡과 비슷한 발음인 이석용으로 잘못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의 의병은 3월 22일 음 2월 9일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성을 내주고 양근 방향 으로 패산했다. 이때 정황을 『동경조일신문』은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 원래 동지同地의 적은 광주·이천·안성·양근 등 제적諸賊이 오합烏合된 것으로 … 22일 오 전 2시경에 산성의 서문에서 홀입忽入해 바로 산정山頂에 올라 성을 내려다보고 일제히 사격을 가하고 또 대성大聲하였더니 적은 예상보다 더 병기저상兵氣沮喪해 있다가 위로부 터 불의의 공격을 받자 낭패하여 급히 동문에서 양근陽根, (楊根의 오기;편자 주) 방향으 로 궤주하였다. 4시반 경에는 험요무비險要無比의 남한산성은 정토군征討軍에 점거한 바 가 되었다. 정토군은 적을 쫓아 30명을 생금生擒하고 동문 부근에서 20여 명을 죽이고, 다음에 생금자生擒者도 살해했다 한다. 註14) 이에 의하면, 남한산성에 웅거하고 있던 양근을 비롯한 광주·이천·안성의 의병이 3월 22 일 새벽 2시경부터 관군의 공격을 받아 4시반경에 동문을 통하여 양근 방향으로 궤주하였 다. 동문의 공방전에서 20여 명이 죽었고 포로 30명도 모두 살해했다. 이승룡은 2월 하순경에 양근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입성하였으며, 『동경조일신문』 4 월 1일자 기사에 의하면, 기사 발송일인 3월 18일 현재 양근의병장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그가 서울의 윤모尹某로부터 내외에서 협공하자는 비밀 서신을 받고 상경하 였으나 오히려 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1896년 3월 27일음 2월 14일 남한산성에서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