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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관군이 다시 반격해 왔는데 피아가 산으로 올라가 싸웠다. 그러나 산은 높고 계곡은 깊어 우리의 화승총 탄환이 적에게 미치지 못하여 승부를 분간할 수 없었다. 거기다 밤에 안개 가 짙어 총을 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종을 치며 후퇴하였다. 음성 碑石村으로 가서 유숙 하였다. 4월 29일. 原州 康川에서 수일간 유진하였다. 5월 초 4일. 興湖로 이진하였다. 田奎錫의 군사 300명이 왔다. 고로 韓東直을 참장으로 임명하여 합병하였다. 魯藪 마을에서 유숙하였다. 5월 초 6일. 保安으로 이동하였다. 5월 초 7일. 중군장 이완하가 부모의 병환으로 귀가하였다. 인하여 원주 수성장 具哲祖 가 권한을 대행하였다. 오후에 장기렴의 병사 200명이 추격해 왔다. 병사들이 다 지쳐서 접전할 수가 없었다. 비를 무릅쓰고 행진하여 金台村에 숙박하였다. 5월 초 8일. 큰 비가 그치지 않아 유숙하였다. 5월 초 9일. 비가 그치지 않아 진을 칠 수가 없었다. 元容錫을 중군장으로 임명하였다. 5월 초 10일. 제천을 향해 이진하였다. 新林에서 점심을 먹고 茅山에서 잤다. 5월 11일. 방학교로 진을 옮기고 수일간을 머물렀다. 인하여 춘천의병 이경응이 55초의 군사를 이끌고 본진에 들어왔다. 5월 14일. 京兵이 아군을 습격하기 위해 영월로 들어왔다고 한다. 5월 15일. 평창으로 이동하였다. 때는 무더운 여름인데 겨울옷을 입고 비를 맞아 흠뻑 젖어 땀까지 배여 옷에서 악취가 났다. 대장이 진중에 있는 백목을 하사하여 새 옷을 지어 입게 하였다. 포군들은 집에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장은 말 하기를 만일 적과 접전하는데 우리가 노인이라 하여 집으로 가 버린다면 이것을 의병을 일으킨 본의가 아니다. 쉬고 싶어서 집으로 돌아간다면 軍需가 부족한 이때에 식솔 한 사 람을 더하는 꼴이 되니 유익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 운량사 이필근이 대 장에게 우리들 노인들만은 특별히 귀가하여 후일을 기약하게 하자고 제의하니 대장이 이 를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각자 귀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