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page

282 공자는 무릇 난신적자라면 사람마다 베어 없앨 권리를 갖는다(夫亂臣賊子人人得誅)고 하였다. 이것은 먼저 군사를 일으키고 나중에 임금에게 아뢰어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 하는 것이 후세의 어진 이의 正論이다. 어찌 이것을 오늘의 준거가 아니라 할 것인가. 적의 도당이 무서워서 움츠리고 있다면 이는 비록 제 몸을 유지하고 처자를 보호하는 계획은 되겠지만 고금을 통해 보면 나가기도 두렵고 물러가기도 두려워서 형세를 사려 서 향배를 결정하는 자가 과연 모두 실제로 제 몸을 유지하고 처자를 보존하였다고 하 던가. 설혹 유지하고 보존하였다 하더라도 백세를 두고 엄한 꾸지람을 받을 것이니 어 찌 할 것인가. 의리라고 하는 정당한 길이 있으니까 삶이 죽음보다 욕됨이 없고 죽음 이 삶보다 영화로움이 있는 것이 아닌가. 맹자는 “하고자 하는 것이 삶보다 더한 것이 있다”(所欲有甚於生者)고 하였고 공자는 “仁을 행함으로 인해 죽는 자를 보지 못했다.” (未見蹈仁而死者) 하였으니 이 두 말씀이 오늘의 斷案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라건대 오늘부터 取捨를 決斷하고 충의를 분발하여 처지에 따라 힘을 다하여 한 덩 어리로 뭉쳐서 적의 도당을 소탕함과 동시에 분을 풀고 부끄러움을 씻으며 대의를 천 하에 핀다면 어찌 공사 간에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비록 지난날 적당에 뛰어든 자라 하더라도 진실로 큰 공을 세운다면 그 죄를 면하게 될 것이다. 각기 마음을 뉘우쳐 함 께 대사에 참여한다면 이상 더 다행한 일이 없을 것이다. 4월 초 10일. 소모대장 徐相烈이 영남에서 일곱 읍의 병사들을 지휘하여 尙州 태봉의 왜 적을 공격하였다고 하는데 물리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예천에 있던 李南圭의 관병이 안동 으로부터 내습하여 마침내 영남을 포기하고 단양으로 퇴군하였다고 한다. 李南圭와 通謀 하던 者 柳蘭永을 묶어서 大陣에 보냈다. 단양에 유진하였는데 舍人 嚴이 필마로 제천으 로 돌아왔다. 영남에서 일어난 패전 소식을 상세히 보고 하였다. 4월 11일. 李麟榮이 淸人 7명을 소모하여 대진에 붙였다. 4월 12일. 관병이 淸風 北倉에 쳐들어왔다. 우군장 李康年 선봉장 손중국이 적과 접전하 였으나 모두 이기지 못하고 대진에 돌아왔다. 각 진의 별사들이 모두 제천에 모였다. 4월 13일. 병정(관병)들이 제천읍을 침범하였다. 각 진의 병사를 동원하여 적과 접전하였 다. 비바람이 크게 불어 화약이 모두 젖어 총을 쏠 수가 없었다. 저들 왜군의 총은 비가 와도 상관이 없는 신식 소총인지라 총을 쏘면서 접근해 오니 아군은 모두 흩어졌다. 중군 장 安承禹 종사 洪思九가 모두 전사하고 대진이 마침내 퇴각하여 放鶴橋에 유진하였다. 그날 밤은 김 진사 댁에서 유숙하였다. 4월 14일. 단양을 향해 진을 옮겼다. 영춘 심곡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단양에 도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