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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이 글을 쓰고 나니까 분노가 치밀어 나는 며칠이나 밖에 나가지 못했다. 두문불출하면서 감회를 다음과 같은 시로서 달랬다. 영주 제천 땅 오래 살았는데 꽃다운 풀 무성하고 버들가지 드리웠네 백수로 종군한 것을 웃지 마시오 일편단심 나라 위해 복수하는 것을 내 어찌 사양하리 임진왜란이 엊그제와 같은데 그 원수들을 추대하여 정치하니 臣子로서 죽을 날이 바로 지금이 아니고 언제인가 가련하다. 수 10년 燈下에서 공부하였으나 아직도 이기지 못하고 의병을 해산하지 못하는구나 3월 21일. 군중에 마른 식량[乾糧]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대장이 운량소에 분부하기 를 흰떡가루를 준비하라 하였다. 그리고 예천의 활 만드는 공장(弓匠) 4명을 불러 木弓과 弩弓을 만들어라 명하였다. 3월 27일. 단양 등지가 빈 땅이 되었다. 적이 엿보기가 쉬워서 이완화를 仗義將 아들 장 익환을 仗義中軍으로 삼아 엄히 방위토록 하였다. 그러나 병사는 불과 1백여 명이요 留陳 將은 林 모, 參謀는 李淑夏, 從事는 鄭翊, 先鋒將은 金炳壽, 運糧은 李範이 맡고 掌財는 嚴星河, 書記는 金東一이 맡게 하였다. 4월 초. 류인석 대장이 檄告內外百官文을 지어 의병을 일으킨 뜻을 천하에 알렸다. 아! 원통하다. 이 나라가 수십 년 이래로 綱常大變이 한두 번 일어난 것이 아닌데 갈 수록 자시하여 마침내 오늘에 이르러 극에 다다랐다. 국모께서 왜적의 포악한 칼날에 시해를 당하시고 임금께서도 그들의 흉악한 가위에 머리를 깎이셨다. 그 화가 8도에 미치니 우리 백만의 생명이 부모의 유체조차 보존할 길이 없게 되었다. 이야말로 천지 개벽 이후 이보다 더 큰 변고가 어디 있는가. 우리나라가 5백 년 예의의 문화와 삼천리 冠裳의 풍속이 하루아침에 망극한 화를 입 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참혹하고 또 참혹하도다. 국가를 위해서도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는 원수요 부모를 위해서도 또한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는 원수이다. 진실로 인류 로서 단 일분이라도 常道를 지키는 자라면 피눈물을 뿌리며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을 것인가. 아! 저 10적 놈들은 가장 흉하고 가장 사악한 놈들로서 왜적보다 더한 놈들이다. 의 리가 무엇보다 더 크고 강상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그 놈들에게야 바랄 것이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