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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려울 뿐만 아니라 또 적이 병참 좌우에 사람 키 절반가량 깊이로 땅을 파서 군졸들이 일 어나서는 총을 쏘고 앉아서는 몸을 숨기니 끝내 적을 토벌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들리는 소식에 소모장 서상열이 충주에서부터 영남으로 가서 일곱 읍에서 장정을 수천 명이나 모 집하여 안동에 유진하였다고 한다. 서상열은 義城의 군수를 잡아 처단하고 예천에 들어가 또 군수를 처단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군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고 한다. 또한 상주에 가서는 태봉에 주둔한 왜군을 토벌하였다. 의병이 초창기라 전투를 알지 못하여 포성만 들 어도 7읍의 병졸들이 각기 도망하였는데 서상열은 예천에서 퇴각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3월 초 1일. 軍需品이 미흡하여 사객종사 안신모와 강란수가 역의 賭地를 거두어 오라는 大陳의 명령을 받았다. 집에 서신을 붙였다. 3월 초 2일. 오늘은 아버님의 제삿날인데 軍務로 인하여 참례하지 못하니 가슴이 아프고 실로 난감하다. 충주성에 있을 때 왼편 귀에 석유가 들어가 항상 염려를 했었는데 마침 오 늘 고름이 나오고 점점 귀가 어두워지니 마치 귀머거리와 같이 답답하다. 군량이 줄어들어 서신으로 대장에게 알리고 종사 鄭翊을 시켜 단양의 사창[社還]에 있는 곡식을 내어오게 하였다. 3월 13일. 충주에서 들려오는 말이 京兵 4백 명이 청풍 黃江에 이르러 엄히 파수를 보며 유진하였다 하는데 그 목적은 의병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 며칠 뒤 종사 沈履 燮과 李建永이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가서 서쪽의 소식을 물으니 그들은 이미 의병을 배반 하고 개화파에 귀의하여 경병대장 장기렴과 더불어 공모하여 내려왔다고 한다. 그래서 류 인석 대장이 그들을 대하지 않고 의진 밖으로 내쫓았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는 뒤부터는 괴변이 자주 일어나 병졸을 이끌고 와서 의병을 항거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명을 받들어 宣撫하는 자도 있었다. 민영기가 宣撫使로 내려와서 먼저 驪州의 심상희를 만나보고 설득 하기를 “조정의 衣冠은 이미 예전대로 복구하였고 단발령도 시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러니 모름지기 각자 본업으로 돌아가서 국가가 낭패하지 않게 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심상희가 의병을 해산하려 해도 병사들이 듣지 않아 민영기가 원주로 떠났다고 한다. 며칠 이 안 되어서 소위 경병대장 장기렴이란 자가 의리에 벗어나는 억설로 편지를 써서 보내 왔다. 의병대장 류인석은 義理에 의거하여 책망하는 답서를 보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 다. 오호! 지금 우리가 의병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신민 치고 그 까닭을 모 를 사람이 있겠는가. 대저 원수를 갚고 수치를 씻는 일과 존화양이의 의리는 만고에 바뀔 수 없는 대원칙(常經)이다. 근자에 10명의 逆黨이 나라 안에서 화란을 일으키고 밖에서는 왜놈들이 장난질을 하